[서양외교사]비스마르크&비스마르크&비스마르크의 동맹체제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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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외교사]비스마르크&비스마르크&비스마르크의 동맹체제에 관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비스마르크 외교정책의 기조
2. 3제 협상(the League of the three Emperors, l`entente des trois empereurs)
3. 발칸 위기(동방문제)와 베를린 협정
4. 독-오 동맹(양국동맹: Dual Alliance, 1879. 10)
5. 제2차 3제협상(1881)
6. 3국동맹(Triple Alliance, 1882)
7. 불가리아 사태와 1887년의 위기
8. 비스마르크 동맹체제의 재정비
9. 비스마르크 동맹체제의 내재적 모순과 붕괴의 시발

본문내용

- 방어동맹인 3국동맹이 이탈리아가 프를 공격할 경우를 목적으로 함에 따라 공수(攻守)동맹의 성격을 띄게 됨
3). 재보장조약(Reinsurance Treaty) 체결(1887. 6. 18): 독-러간
(1). 배경
- 3제협상의 유효기간이 1887년 6월에 끝나게 되어 연장 여부를 놓고 러 정부내에서 이견 표출 → 3제협상 폐기와 프와의 동맹론 제기(발칸에서 영국과 오헝에 대결 가능 제기) → 그러나 오헝을 제쳐놓고 독일과 단독으로 조약을 체결하고 불가리아에서 러의 특수 이익을 인정받자는 의견이 지배적
- 비스마르크는 1879년 독-오헝 동맹조약을 1888년 2월 공개한 것과 같이 오헝에 대한 두려움을 사게 하여 러로 하여금 독과 동맹이냐 결별이냐의 양자택일 강요(러내에 일고있는 반독, 반오헝 분위기에 경고)
(2). 내용
- 양국 중 일국이 제3국과 전쟁시 타국은 우호적 중립을 지킴. 예외로 단 어느 일국이 프나 오헝에 공격을 가함으로써 발생되는 전쟁에서는 이 조항은 적용되지 않음
- 불가리아, 동루멜리아에 대한 러의 우월성 인정
- 해협폐쇄(터키해협: Turkey Straits)의 원칙(1841. 7 해협조약) 재확인. 본 조약은 3년간의 유효기간을 가지며 비밀에 부침
- 부속의정서: 독은 불가리아에 합법적인 정부 수립 지원, 알렉산더 공의 재등장에 독일은 반대함
(3). 평가
- 러는 자국의 동발칸지역에서의 지위에 대하여 독일의 보장을 받았으며, 독일은 러가 프에 접근하는 것을 저지시킬 수 있었음.
- 정치적으로 독-오헝, 독-러 조약이 상호 모순되지 않음(독일로서는 당분간 오헝-러간의 균형유지를 위함)
- 1879년 독-오헝 조약의 내용과 상치한다는 주장이 있으나, 고도의 정치적인 조약을 법형식의 논리에서 해석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음.
- 유효기간이 끝이 난 1890년에 독일에서 연장을 반대하여 종료되도록 방치됨. 이후 러는 프랑스에 접근하게 됨. 1896년에 본 조약 자체가 세상에 알려졌으나 전모는 1918년에 알려지게 되었음.
4). 제2차 지중해 협정(1887년 12월 12일, 혹은 근동앙탕트(Entente))
- 1887년 7월 불가리아의회는 친 오헝의 페르디난드를 불가리아공으로 선임. 러의 군사개입에 대비하여 영국, 오헝, 이탈리아간의 각서교환. 이는 솔즈베리(Salisbury) 영국외상의 작품. 1892년 종료.
- 내용: 동방의 현상유지 보장, 터키가 외국의 지배를 받는 것에 반대. 터키는 불가리아의 현상유지. 터키는 해협이나 소아시아지방에서의 권리를 양여할 수 없음.
- 발칸에서의 현상유지가 목표. 재보장조약으로 러를 지지하고 제2차 지중해협정을 통해 타국으로 하여금 러를 저지하도록 함(비스마르크 외교의 극치)
5). 독-이간 군사합의(1888년 1월 28일)
- 독일과 프랑스가 전쟁할 경우 이탈리아는 독일에 군사적인 지원을 할 것을 약속(양국간 급격하게 밀착된 양국간의 경제관계를 반영)
* 이 합의를 끝으로 프랑스의 고립과 유럽의 현상유지를 목표로 하는 비의 동맹체제가 완성됨(교과서 193쪽 그림 참조)
9. 비스마르크 동맹체제의 내재적 모순과 붕괴의 시발
1). 비스마르크 동맹체제의 기본가정
프랑스의 고립과 유럽국제정치 질서의 현상유지를 목표로 그의 동맹체제는 세 가지 기본입장에 입각
(1). 지정학적 고려
- 독일은 양면전의 위험에 있으며 지중해에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간에 충돌이, 발칸에서는 러와 오헝간에 충돌이 일어난다는 것을 가정.
- 지중해: 영국(현상유지) ↔ 이탈리아(프랑스의 북아프리카 경영에 대한 대가요구)
- 발칸: 오헝(현상유지) ↔ 러시아(불가리아에서의 후퇴 감수를 해협에서 보상)
- 비스마르크는 동맹국들의 이러한 주장을 지속적으로 조화할 수 없는 것임.
(2). 이데올로기 측면
- 비는 유럽군주들 중심의 국제정치질서를 계속 존속시킬 수 있을 것으로 믿음(비스마르크 체제는 메테르니히체제 처럼 반동적임). 이는 19세기 후반의 민족주의운동과 정반대의 성격
(3). 유럽적 정치
- 비 유럽지역에 대한 철저한 경시 → 해외시장이 유럽경제에 필수적 요소로 등장하자 비스마르크체제는 더 이상 존속하지 못함
* 결국, 비스마르크는 19세기 최후의 고전적인 외교관으로 평가. 1890년부터 20세기 현대적인 요소들이 등장. 비체제의 내재적 모순이 현실로 나타나고 프-러간의 새로운 관계 수립은 비체제의 붕괴를 예고
2). 프랑스-러시아의 접근
- 러는 자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외국자본의 도입 필요(철도부설, 군비증강, 재정적자의 보전을 위해 외자도입이 필수)
- 독일, 영국, 네덜란드는 저렴한 이자의 차관 제공 거부. 프랑스 자본가들이 러에 대한 투자에 흥미를 보임. 프랑스는 1888년 10월 파리-네덜란드은행(Banque de Paris et Pays Bas)의 차관공여를 시발로 1890년 1월까지 3차례에 걸쳐 차관공여.
- 프 국내의 불랑제 운동이 퇴색되고 프-러간의 정치적 접근도 경제적 접근과 더불어 무르익어 감. 프랑스 내에 러시아 붐이 일어났으며, 정치인들과 여론은 러의 군사력을 높이 평가하고 독일의 위험에 대비 러와의 연결 주장.
- 비스마르크는 이에 대비 영국카드를 사용, 1889년 1월 솔즈베리 외상에 3국동맹을 축으로 하는 동맹을 제의했으나 거부됨(영국은 대륙국가와 동맹을 체결하는 것은 자국의 전통적인 유럽의 세력균형자로서의 정책과 모순됨을 인식)
3). 비스마르크의 해임(1890. 3)
- 1888년 독일 빌헬름 2세가 즉위하자 그는 비스마르크와는 달리 독일의 영광을 세계에서 찾으려 하였음. 75세의 비스마르크 노 재상과의 대립은 1890년 사회주의법령의 개정 문제에서 첨예화.
- 외교정책에서의 대립은 러와의 재보장조약의 연장에 관한 문제였음. 황제와 외무상 Holstein은 그 연장에 반대(외교사가들은 홀슈타인에 대해 독일의 외교를 파국으로 몰고 간 장본인으로 취급 → 제1차세계대전의 발단 책임의 일단이 그에게 있음)
- 1890년은 비스마르크의 퇴임과 더불어 세계외교사의 전환기임 → 국제정치질서에 있어 현대적인 요소가 나타남. 유럽국제정치질서의 전 세계적인 팽창이 시작되고, 비스마르크체제는 붕괴를 맞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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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6.18
  • 저작시기20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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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4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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