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 백제토기(百濟土器)에 관한 자료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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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백제토기의 성립과 변화

2. 토기(土器)란

3. 백제토기의 발달과정과 역사

4. 백제토기의 특징

5. 백제토기의 구분

6. 백제토기의 분류
1) 큰항아리 3~5세기
2) 곧은목항아리 3~5세기
3) 짧은목항아리
4) 짧은목항아리 5~6세기
5) 항아리 3~5세기
6) 세발토기 3~5세기

7. 백제토기의 종류와 특징
1) 승석문항아리
2) 치미
3) 도용(陶俑)
4) 변기(便器)
5) 옹관(甕棺)

8. 백제시대의 요지(窯址)- 기와요지와 토기요지

참고문헌

본문내용

절단면에는 목심(木心)을 꽂아 몸체와 연결시키기 위한 소공(小孔)이 뚫려있는데 이러한 제작방식 및 이국적인 용모는 중앙아시아 및 중국 북수귀(北垂鬼) 도용 양식과 연관되어 백제의 국제적인 문화 교류상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4) 변기(便器)
높이 : 16.3 cm /길이 : 36.0 cm /너비 : 26.2 cm
변기(便器)로서 완형이다. 경질(硬質)으로 연한 회청색을 띤다. 소성이 양호하며 태토는 정선되었다. 저부(底部)는 원형인데, 구연쪽으로 올라갈수록 한쪽이 넓어져 구연은 타원형을 이룬다. 구연 가까이에는 1조(條)의 침선문이 돌려져 있으며, 양쪽에는 대상파수(帶狀把手)가 1조(條)식 붙어있다. 기면 곳곳에 기포가 부푼 흔적이 있다. 형태로 미루어 보다 여성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5) 옹관(甕棺)
충남 부여군 부여읍 염창리 상염부락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부여지방에서 발견된 독무덤은 주검을 매장하기 위하여 독널을 특별히 제작하기 보다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항아리를 그대로 쓴다하여 일종의 호관묘(壺棺墓)라고도 불리운다. 이 옹관은 뚜껑부, 항아리로 구분된다. 파손·복원된 상태이고, 항아리는 밑이 둥글며 짧은 목과 구연은 외반된 상태이다. 어깨부에서 최대로 벌어져 서서히 좁아지는 상태이며, 기면에는 소성이 열에 의해 발생되는 기포(氣泡)가 있다. 기면(器面)의 전면(全面)에는 방향없이 조잡하게 타날된 선문이 나타나있다. 항아리 바닥부분의 중앙부에는 관통된 구멍이 있는데 이는 독널로 사용할때 배수를 목적으로 뚫은 것으로 보인다. 색조는 회청색 경질토기이며, 뚜껑부는 자배기와 흡사하고 둥근 바닥에 몸통은 약간 넓어지며 올라가다 한단 좁혀 매우 짧은 목을 만들었다. 구연은 두툼하게 접어 돌리고, 몸통 전면에 선문이 교차된 상태이다. 색조는 회갈색 연질(와질)토기이며, 항아리, 뚜껑등은 모두 고운 점토로 제작된 대형급 옹관이다.
8. 백제시대의 요지(窯址)- 기와요지와 토기요지
백제시대의 요지(窯址)는 크게 기와요지와 토기요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또한 기와와 토기를 동시에 구웠던 요지도 있다. 백제시대 요지는 크게 아궁이, 연소실, 소성실, 굴뚝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궁이는 불을 지피는 입구이다. 연소실은 아궁이를 통하여 땔감이 지펴지는 곳이다. 소성실은 구워야 할 물건을 재는 곳으로 가마에서 가장 넓은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굴뚝은 연기를 뽑아내기 위한 구조물이다. 백제시대 요지는 앞에서 설명한 네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러한 구조가 간략화되는 경우도 많이 찾아 볼수 있다. 백제시대의 요지는 지하에 조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며 이것은 다시 등요(登窯)와 평요(平窯)로 나누어볼 수 있다. 등요는 언덕의 경사면에 터널형으로 길게 설치한 것으로 평면형태가 부정형의 삼각형 또는 독사뱀머리형태를 띠고 있다. 이에 비하여 평요는 평평한 곳에 만들어진 것으로 평면형태가 사각형이다. 백제의 요지가 입지한 곳은 대부분 가마를 마련할 수 있는 경사면과 쉽게 굴을 팔 수 있는 풍화암반이 있는 곳이 많이 채택되었다. 백제시대 와요지(瓦窯址)는 대부분 지하의 굴을 뚫어 만든 굴가마이다. 가마는 굴을 파들어가 우선 기본 모양을 만든 후 아궁이부분은 긴 돌을 사용하여 입구를 마무리하고 필요할 때는 주변의 기와, 전돌, 작은 돌이나 진흙을 함께 사용하여 보완하기도 하였다.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와요지는 주로 부여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집중분포하고 있다. 예를 들면 부여 정암리유적, 동남리유적, 신리유적, 쌍북리유적, 현북리유적, 소룡골유적, 정동리유적등을 들 수 있다. 이밖에도 청양 왕진리유적, 보령 천방유적등이 있다.
이중 가장 규모가 큰 정암리유적의 경우 1차 조사에서는 2기의 와요지를 조사하였고, 2차 조사에서는 10기를 조사하여 모두 12기가 정식으로 조사되었다. 12기의 와요지중 11기가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출토유물로는 다양한 무늬가 있는 평기와와 와당(瓦當), 전돌등이 있으며 벼루나 토기등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정암리요지가 순수하게 기와만 구웠던 것이 아니라 토기도 같이 구웠던 와도겸업용(瓦陶兼業用)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토기요지(土器窯址)는 각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진천 산수리·삼룡리유적, 해남 군곡리유적, 승주 대곡리유적, 평택 현화리유적, 광주 신창동유적, 아산 운곡리유적, 익산 신룡리유적, 부여 송국리유적등을 들수 있다. 이중 진천 산수리·삼룡리유적만이 순수하게 토기요지로서 발견된 것이고 나머지유적들은 주거지나 조개더미를 발굴할 때 발견된 것이다.
진천 산수리·삼룡리유적은 원삼국초기부터 A.D.4세기경까지의 토기요지로 모두 19기가 조사되었다. 이를 통해서 원삼국시대 토기요지의 특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 지역의 토기요지는 모두 미호천변에 위치한 야산의 경사면에 입지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구조상의 특징으로는 아궁이를 꼽을 수 있다. 이 유적의 아궁이는 대부분 생토면을 수직으로 깊숙히 파고 설치하였기 때문에 연소되는 면이 지하에 깊숙히 위치하고 있다. 또한 굴뚝은 가마뒷면에 따로 빼서 설치하지 않고 연소실 뒷부분의 천장을 뚫고 설치하였다. 산수리·삼룡리유적의 토기요지들은 크기가 대형과 소형 두가지로 나누어지는데 대형가마는 모두 지하식이고, 소형가마는 모두 반지하식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차이는 토기제작 용도와 관련된 것일 수도 있고 또는 구조적 변천의 차이일 수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출토되는 타날문토기의 유형은 원삼국초기부터 말기이후까지 크게 차이는 없다. 다만 시기가 늦을수록 연질토기보다는 경질토기의 비율이 높아지고 토기의 기형이 전형적인 백제토기의 기형에 가깝게 변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참고문헌
金元龍, {한국고고학개설}, 一志社, 1986.
姜仁求, {고고학으로 본 한국고대사}, 學硏文化社}, 1997.
崔盛洛, [국가형성배경에 대한 평가-1∼3세기 백제지역을 중심으로], {東아시아 1∼3世紀의 考古學}, 국립문화재연구소, 2000
토기와 청동기(韓炳三, 世宗大王紀念事業會,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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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6.19
  • 저작시기20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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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4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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