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實學)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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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실학(實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실학의 개념과 발생 배경

2. 학파의 형성과 특성
1) 성호학파의 실학사상
2) 북학파의 실학사상

3. 실학의 심화와 그 영향
1) 실학의 집대성 다산 정약용
2) 고증학과 실사구시의 김정희
3) 실학과 개화사상의 선구자 혜강 최한기

4. 실학의 특성과 의의

본문내용

되는 바와 의뢰하는 바가 오늘날에 있지 옛것에 있지 않으며, 꼭 써야 할 바와 힘써 행할 바가 오늘날에 있지 옛 것에 있지 않으니, 옛 것을 버릴지언정 오늘날을 버릴 수는 없다.”하고 하여 그는 현실에 집중된 문제의식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당시 서세동점의 현실에서 승패의 관건은 ‘실용(實用)’에 있지 ‘풍속예교(風俗禮敎)’에 있지 않다고 인식하였다. 이에 서교(西敎)가 천하에 만연함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취용하여 우리의 낙후한 자연과학 및 물질문명을 증진시키는 것이 당시의 시의(時宜)에 절실하다고 진단하였다.
그는 실용과 사무를 축으로 하여 세상이 변화하여야 한다는 주장하면서 사회 제도의 과감한 개혁을 제기하였다. 그는 백성을 위하지 않는 임금은 일개 잔적(殘賊)일 뿐 임금으로서의 정당성을 상실한다는 맹자 혁명론의 입장을 강화하였다.
또한 그는 농 공 상의 삶을 개혁하는데 관심을 가지면서 정치와 인관의 관계를 매우 중심하여 민생을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국정이 바로 운영되어야 하며 관리 및 토호들이 민생에 부당하게 간섭하는 일이 근절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나아가 더욱 근본적으로 인재의 선발이 국가 치안정교(治安政敎)의 관건이라고 보고, 신분적 제약을 철폐하여 사농공상 모두에게 평등한 인재 등용의 길이 열려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인재를 선발할 때는 나라의 공론에 의거하여야 하며, 한 나라는 그 나라 사람들의 결집된 힘으로 다스려져야 한다는 ‘공치(共治)’를 제기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동서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대동사회(大同社會)의 도래를 낙관적으로 전망하였다. 동서양이 서로 적극적 교류를 통하여 상대방의 선진 문물을 배워 자신의 낙후된 부분을 보완, 증진시킴으로써 인류 전체가 이상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여겼다. 비록 최한기가 제국주의 침탈의 본질을 미처 간파하지 못했다하더라도 그의 개방적인 학문이 서양 문물을 맹목적으로 추종한 사대주의의 산물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는 당시 삶의 현장 속에 있었으며, 전통 유학의 종지를 근본적으로 되살려 시대에 살아 숨쉬는 것으로 轉化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의 학문은 주체적 반성 속에서 진행된 것이며, 그러한 바탕 위에 시대정신을 살리고 지역성을 탈피하여 인류가 하나되는 대동사회를 지향하였던 것이다.
4. 실학의 특성과 의의
실학파의 여러 학자들은 제각기 치중하는 분야를 달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념과 방법에 있어서 당시의 관념화된 주자학적 세계관에 매몰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여 서로 통하는 바가 없지 않았다. 이들의 학풍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학문적 특성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비판 정신이다. 실학파는 종래의 권위적인 주자학의 세계에 매몰되지 않고 자유로운 학문 탐구의 기풍을 추구하였다. 그들은 기성의 폐쇄적인 권위나 사회의 구조적 모순 등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과 함께 새로운 개혁론을 제기하였다. 특히 민족 주체의식과 민본 의식이 이전에 비해 강화된 것도 기성의 권위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실용 정신이다. 실학파는 정덕론(正德論)을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학문의 중심을 윤리 도덕적이고 관념적인 것으로부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 전환하여, 경세치용이나 이용후생 등에 집중적인 관심을 보였다. 이는 당면한 현실 문제와 직결되는 것으로서, 실제 생활에 유용한 것을 추구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민생을 위한 학문과 생산의 증대를 강조하게 되었다.
셋째, 실증정신이다. 성리학의 사변철학적 경향을 탈피하여 학풍의 중심을 객관적인 현실 문제로 전환할 때,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연구 방법이 요구된다. 실학의 기치(旗幟)의 하나인 ‘실사구시(實事求是)’는 좁게는 고증학풍의 성격을 대변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지만, 원래는 ‘무득사실 매구진시(無得事實 每求眞是)’라는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종래 학계에서 실학을 ‘실사구시의 학’으로 정의하기도 한 것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이 실증적 방법은 청조(淸朝) 고증학풍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경서에 대한 고증뿐만 아니라 역사 지리 언어 등 박물학적(博物學的) 연구나 정치 경제 등에 대한 대안에서도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다.
넷째, 민족 주체 의식이다. 실학은 조선 후기 사회의 제반 현실 문제가 시급하고 절실하게 제기되던 상황에서 대두되었기 때문에, 자기 반성적이고 자기 발전적인 노력과 주체적 입장이 강하였다. 당시 사회 현실에 기초한 실용주의적 관심은 정치 경제는 물론, 역사 지리 언어 풍속 등 각 방면에 걸친 연구의 열기를 고조시켰으며, 여기에서 민족 주체의식 내지 독립적 자존의식이 구체화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18세기 초부터 19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고양된 민족 주체의식의 기운을 타고 국학에 관계되는 저술이 많이 쏟아져 나왔던 것은 실학의 주체적인 입장이 잘 반영된 증거라 하겠다.
다섯째, 개방 정신이다. 주자학 일변도의 권위적이고 폐쇄적인 학풍에 탈피하여, 학술 사상에 대해 폭넓은 관심과 자유롭고 개방적인 태도를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지배적인 학풍이었던 주자학에 구애되지 않음은 물론, 역시 절대적 경향이었던 ‘북벌론(北伐論)’이 압도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북학(北學)’을 부르짖는 학자들이 있었고, 이단시되던 양명학이라든지 심지어 사교(邪敎)로 지목되었던 서학(西學)에 몰입한 이도 실학파에서 많이 나왔던 것이다. 최영성, 『앞의 책』Ⅳ, pp.74~75.
실학사상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개화사상으로 연결되어, 한국 근대사상 형성의 주류로 기능하였다. 실학의 민족 주체의식과 실용 정신 그리고 비판 정신과 개방 정신은 근대사상의 면모로서 손색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실학사상은 근대사상의 맹아로 규정하기에 충분하며, 이러한 성격이 개화사상의 태동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한국사상은 정체성(正體性)과 연속성을 지니면서 근대적 전환을 이루었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최영성, 『한국유학사상사』Ⅳ, 아세아문화사, 1995.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좌한국철학』, 한국철학사상연구회, 1996.
한국철학사연구회, 『한국철학사상사』, 한국철학사연구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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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9.09.07
  • 저작시기2008.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5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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