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월남전)전쟁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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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베트남(월남전)전쟁에 대한 고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베트남전

●배경

●진행

●평화협정

●사이공정부의 항복

●결과

●대한민국 참전

●파병일지

●국교정상화

●평가

본문내용

와 동일하게 대우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세계평화 유지에 공헌한 월남전쟁 유공자"라는 문구에서 베트남 전쟁을 〈민족해방운동〉으로 자부하고 있던 베트남 정부가 강력하게 항의를 하였다. 결국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10월 12일 하노이를 방문하여, 외무부 장관을 만나 "월남전쟁"이라는 문구를 삭제하고 일단락 지었다. 11월 2일 라디오 연설에서 "베트남과는 러시아, 중국과 같은 최고 수준의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베트남 주석과는 형-동생하는 관계를 맺었다"고 소개를 했다. 이에 대해 야당은 외교적 과오와 실책을 공개하지도 않고 자화자찬했다고 비난하였다
●평가
긍정적 요인
집요한 참전 의사를 밝히던 박정희 정부는 1964년 5월 9일 미국의 정식 파병 요청에 따라 1964년 9월 11일부터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파병하였다. 베트남 참전의 대가로 한미외교의 강화와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이후 기근과 고아의 나라로 인식되던 대한민국이 타국의 전쟁에 대규모 파병을 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는 등 국제사회의 지원으로 연명하는 나라로 인식된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기간에 파병 국군장병이 해외근무 수당으로 벌어들인 수입은 총 2억 3556만 달러였다. 이 중 82.8%에 달하는 1억 9511만 달러가 국내로 송금되었고, 이 돈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에 기여되었다. 전쟁에 조달할 군수물자 납품과 용역사업 투입 등으로 한국 기업들은 베트남전 특수(特需)를 톡톡히 누렸다. 국군의 파병 대가로 들어온 외화 송금에 힘입어 당시 내수산업과 수출이 성장하여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전투병 파병 직전인 1964년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03달러에서 한국군 철수가 끝난 1974년에는 5배가 넘는 541달러로 국민 소득을 향상되었다.
또한 월남 참전으로 M1 소총 등 재래식 병기와 군용장비에서 M16 소총 등으로 병기와 군용장비의 근대화와 개량 등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부정적 요인
1964년에 의무중대 파견을 시작으로, 1965년부터는 맹호, 청룡부대를 파병하였고 1966년에는 백마부대의 파견으로 연인원 30만 명, 최대 5만 명을 파병하였다. 이 중 5,099명의 사망자(KIA)가 발생했으며, 11,2320명의 사상자(WIA)와 4명의 실종자(MIA) 그리고 참전 군인 중 이후 159,132명이 고엽제 등으로 인한 후유증을 앓고 있는 참전용사가 발생하였다.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하여 경제 발전에 필요한 외화수입이라는 많은 경제적 이익과 한국전쟁 이후의 실제 전투 경험을 얻은 반면 그 대가로 파병자 중 5,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참전군인 중 이후 2만여 명이 고엽제 등으로 인한 후유증을 앓고 있는 참전용사가 많다. 이 파병기간 도중 미군의 밀라이 학살사건과 비슷한 파월 한국(남한)군에 의한 빈호아사 커우 마을 학살사건(1966년 12월 6일, 131명 사망) 등의 민간인 학살들이 있었다.
일각에서는 베트남 참전을 베트남의 민족 해방 운동을 방해하였다며 비판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동국대학교 교수 강정구 등에 의해 베트남에서 발생한 학살사건의 책임자라는 비판이 있기도 하였고, 2000년 한국 대통령 김대중은 베트남을 방문, 베트남 국민들에게 사과를 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하여 베트남 참전 전우회 등 참전유공단체 및 참전 유공자 등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리고, 2001년 8월 23일 김대중 대통령은 방한한 쩐득르엉 베트남 국가원수에게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라고 공식 사과했다. 그러나 일부 시민 단체에서는 그 이상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소리도 있다. 이에 대하여 베트남 참전 전우회 등 참전유공단체 및 참전 유공자 등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한편 전쟁 당시 베트남에 진출한 대한민국 기업인들과 군인들이 현지에서 베트남 여성들과의 사이에 낳은 2세들인 라이따이한(Lai大韓, Lai Daihan)과 대한민국군 일부가 베트남전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과 부녀강간[20]에 대한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조사와 배상이 이뤄지지 않고 있어 양국 관계에 잠재적 문제가 될 소지를 안고 있다.
1999년 이래 진보적인 주간지 《한겨레21》에서 대한민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에 대해 현지 취재를 하고, 관련자의 증언을 기사화하였으나, 참전자 단체들이 이에 반발하여, 2002년에는 사무실에 난입하기도 하였다.
  • 가격2,0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9.11.30
  • 저작시기2009.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63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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