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봉건제도의 붕괴와 발전과정 및 중세문화의 쇠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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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세 봉건제도의 붕괴와 발전과정 및 중세문화의 쇠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I. 서 론

Ⅱ. 본 론
제 1절: 봉권제도의 붕괴와 근대국가로의 발전과정
1. 봉건제란?
2. 봉건제 기원
3. 봉건제의 성격과 역할
4. 흑사병
1) 흑사병에 대한 반응- 전반적인 공황과 도덕의 붕괴
2) 결과
5. 농민반란
6. 영국의 발전
7. 백년전쟁
8. 백년전쟁후의 프랑스
9. 중세말의 영국
10. 장미전쟁
11. 중세말의 독일
제 2절:교황권의 쇠퇴와 중세문화의 조락

Ⅲ. 결 론

참고 문헌

본문내용

하였다. 장궁대(長弓隊)와 말에서 내린 기병으로 이루어진 영국군의 작전이 프랑스군의 노병(弩兵)과 중기사대(重騎士隊)를 혼란시켜 프랑스군은 대패하였다. 이 전투로 북프랑스에서의 우위를 확보한 영국군은 나아가 해항 칼레의 포위진을 폈다.
12. 그 외의 국가들
13세기 중엽에 합스부르크家가 이지역에 세력을 확대하려고 하자 삼림지대의 3개주가 동맹을 맺고 이에 저항하여 14세기 초에 합스부르크군을 격파하였다(모어가르텐 전투). 이것이 오늘날 영세중립국 스위스의 출발이다. 그 후 다른 주들도 동맹에 참가하여 14세기 말 합스부르크군을 격파하여 독립의 기반을 굳혔다. 그 후 영토를 더욱 확대하고, 1477년에는 남쪽으로 팽창하려는 부르고뉴공 샤를르를 격파하여 전유럽에 그 용맹을 떨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이탈리아로 진출하려다가 프랑스군에게 격파당한 뒤 도로 알프스 산맥으로 올라갔고, 그 이후 지금까지 영세 중립의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의 이른바 북구 3국은 칼마르동맹으로 통합되었으나 스웨덴의 민족주의적 반란이 거듭된 끝에 스웨덴이 따로 독립하여 동맹은 깨지고 말았다.
러시아는 13세기에 몽고족의 침입이래 여러 공국으로 분열되어 봉고족의 통제하에 막대한 공납을 바치게 되었다. 이반 3세때 몽고족의 내분과 이로 인한 약화를 틈타 몽고의 지배로부터 해방되고 다른 러시아공국들을 통솔하게 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재정복을 통해 성립한 아라곤, 카스틸라, 포르투갈의 크리스트교 3왕국이 그라나다의 무어인 이슬람 국가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는 가운데 도시경제가 발달하고 신분제 의회인 코르테스도 발전하였다. 아라곤의 페르디난드와 카스틸랴의 이사벨라의 결혼으로 에스파니아 왕국이 탄생케 되었다.
제 2절:교황권의 쇠퇴와 중세문화의 조락
교황권의 성장은 민족이동과 서로마제국의 몰락으로 조성된 혼란과 무질서상태라는 중세초기의 역사적인 상황과, 지방분권적인 봉건사회의 구조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엇다. 그렇기 때문에 중세말에 이르러 봉권사회의 붕괴, 집권적인 통일국가 성장에 따라 교황권은 존립 기반을 상실하면서 세속적인 왕권의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교황권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13세기말 프랑스 필립 4세가 가스코뉴 공령의 쟁탈전에 필요한 전비를 염출하기 위하여 국내 성직자에게 과세하려 하자, 국하게 되었다. 이에 필립 4세는 프랑스로부터 교황청으로 금전유출을 금지하고 날카로운 대립을 벌였다. 교황은 이에 맞서 "만일 세속권이 과오를 범하면 영적 권력에 의하여 심판을 받아야 하며, "영적 권력은 위엄이나 고귀함에 있어 어떤 세속권보다 우월하다는" '우남 상크탐'을 발휘하였다.
이내 필립은 교황을 습격하여 사로잡았다. 다시 풀어주나 충격과 굴욕으로 곧 교황은 사망하였다. 1305년 새로운 교황으로 크레멘트 5세가 선출됐다. 그는 28명의 추기경을 새로 선출하였는데, 그 중 25명이 프랑스인 이였고, 그는 거처를 남불의 아비뇽으로 옮겼다. 아비뇽은 프랑스 세력하에 있던 곳으로, 이 사건으로 교황권은 완전히 프랑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 사건을 '교황의 바빌론 유수'(The Babylonia Captivity of the Pope 1309-1376)라고 한다.
1377년 교황청은 다시 로마로 돌아가게 되고 로마시민의 압력으로 이탈리아 출신의 우르반 6세가 교황으로 선출되나, 곧 추기경들과 대립하게 되어 새로이 프랑스인 교황 클레멘트 7세를 선출하고,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겼다. 이 사건으로 교황청은 로마와 아비뇽으로 갈라지고 이른바 '교회의 대분열'(Great Schism 1378-1417)로 알려진 크리스트교 세계의 양분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교회의 대분열의 사태수습 방법으로 두 교황의 퇴위가 결정되고,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었으나, 기존의 구 교황이 퇴위를 거부하여 세 사람의 교황이 있게 되는 형세가 되었다.
1414년 교회의 대분열을 종식시키고 이단을 억압하며 교회의 개혁을 도모하기 위하여 콘스탄츠 의회(Council of Constance)가 소집됐다. 신앙문제에 있어서의 공의회의 정당성과 권위를 규정하고, 교황도 이에 복종해야 한다는 결정이 채택되고 새로운 교황을 선출함으로써, 교회의 대분열은 종식되었다.
Ⅲ. 결 론
장원제도의 붕괴와 도시의 변화는 봉건제도의 붕괴과정에 따른 한 과정이었다. 도시의 반란은 자본적인 세계경제의 출현을 예고하는 조짐이었으며, 왕권을 중심으로 형성되가던 새로운 집권적 통일국가의 등장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농민의 반란은 유럽사회가 봉건사회를 탈피하고 근대사회로 발전하기 위하여 치루어야 했던 '성장의 고통'이었던 것이다.
장미전쟁은 왕가와 대제후 및 귀족들 사이의 싸움이었으며, 양측이 다 일반민중에게 손상을 미치지 않도록 유념하였으며, 대도시들도 중립적인 태도를 지켰다. 그 결과 주로 피해를 입은 것은 내란에 참가한 귀족들이었으며 많은 귀족들이 살해되고 재산이 몰수되었다. 장미전쟁은 말하자면 '귀족층이 스스로의 몸에 가한 流血의 手術'이었으며 일반 국민은 물론 젠트리와 시민계급은 귀족의 횡포와 무질서를 증오하고 이를 방지할 수 있는 강력한 왕권의 출현을 갈망하였다. 절대왕정은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대분열시에 영국과 독일은 로마를, 프랑스와 에스파니아는 아비뇽을 지지하였으며, 이러한 세속적인 세력의 지지가 교회의 분열을 조장하고 장기화 시켰다. 대립하는 두 교황과 세속군주와 결탁은 교황권의 위엄을 손상시킴은 물론, 교회 전체를 타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4.5세기에는 봉건사회와 중세 문화가 붕괴하고 시들어갔으나, 그 밑바닥에서 새로운 사회와 문화가 움트고 태동하고 있었다.
참고 문헌
배 영수편, 서양사강의, 한울, (서울, 1992>
T.H.아스톤,C.H.E.필핀편, 이연규옮김. 농업계급구조와 경제발전, 집문당,1991
정해본씀, 독일근대사회경제사, 지식산업사,1991
P.Anderson,유재건 한정숙 역, 고대에서 봉건제로 이행,창작과비평사,1991
M.Dobb, 이선근역, 자본주의발전연구,동녘,1986
趙璣濬씀, 사회경제사,일신사,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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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12.15
  • 저작시기20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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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67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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