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역사교과서왜곡의 원인, 일본 역사교과서왜곡과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모임, 일본 역사교과서왜곡과 중국의 역사왜곡, 일본 역사교과서왜곡의 쟁점과 사례, 향후 일본 역사교과서왜곡의 대책 방향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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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 역사교과서왜곡의 원인, 일본 역사교과서왜곡과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모임, 일본 역사교과서왜곡과 중국의 역사왜곡, 일본 역사교과서왜곡의 쟁점과 사례, 향후 일본 역사교과서왜곡의 대책 방향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일본 역사교과서왜곡의 원인

Ⅲ. 일본 역사교과서왜곡과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모임

Ⅳ. 일본 역사교과서왜곡과 중국의 역사왜곡

Ⅴ. 일본 역사교과서왜곡의 쟁점

Ⅵ. 일본 역사교과서왜곡의 사례
1. □□서적
1) 야마토 조정의 외교정책 - 한반도의 움직임과 일본
2) 조공
3) 중국·조선과의 교류가 왕성해지다
4) 조선 출병
2. ○○○서적
1)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2) 쇄국 하의 대외관계
3) 한반도와 일본의 안전보장
3. ◇◇◇서적
1) 동아시아의 정세
2) 동학농민운동
3) 일ㆍ청전쟁

Ⅶ. 향후 일본 역사교과서왜곡의 대책 방향

Ⅷ.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사라 부르는 사절이 에도를 방문하여 각지에서 환영받았다. 또 부산에는 ‘종(宗)씨의 왜관(倭館)’이 설치되어 약 400-500인의 일본인이 살면서 무역과 정보수집에 종사하였다.
3) 한반도와 일본의 안전보장
일본은 조선의 개국 후 그 근대화를 돕기 위해 군제개혁을 원조했다. 조선이 외국의 지배에 굴하지 않는 자위력 있는 근대국가가 되는 것은 일본의 안전에 있어서도 중요했다. 그런데 1882년 군제개혁에 소외당한 일부 조선 군인의 폭동이 발생했다(임오사변)
3. ◇◇◇서적
1) 동아시아의 정세
메이지 10년대의 일본에서는 민권론자들이 일본과 함께 아시아 제국에서 민권의 신장과 독립을 기대하면서 아시아 제민족과 연대를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미열강의 아시아 침략이 예상되는 가운데, 일본 정부는 조선에 진출하지 않으면 일본의 장래도 위험하다며 대외팽창정책을 강화하고 있었다.
조선에서는 일조수호조규를 체결한 일본과, 조선의 지배권을 주장하는 청이 세력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조선 국내에서는 메이지유신을 배워 근대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개혁파와, 청과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파의 대립이 격렬해졌으며, 일본은 청에 대항하기 위하여 군비증강을 꾀하고 있었다.
2) 동학농민운동
1894년 조선의 남부에 동학의 난(갑오농민전쟁)이라고 불리는 농민폭동이 일어났다. 동학당은 서양의 기독교(서학)에 반대하는 종교(동학)를 신앙하는 집단이었다. 그들은 외국인과 부패한 관리들의 추방을 목표로 하여 한 때는 수도 한성에 육박하는 기세를 보였다.
3) 일ㆍ청전쟁
청은 최후의 유력한 조공국인 조선만은 잃지 않으려고 하여, 일본을 가상적국으로 삼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의 개국 후 그 근대화를 돕기 위해 군제개혁을 원조했다. 조선이 외국의 지배에 굴하지 않는 자위력 있는 근대국가가 되는 것은 일본의 안전에 있어서도 중요했다. 그런데 1882년 군제개혁에 소외당한 일부 조선 군인의 폭동이 발생했다(임오사변).
청은 이에 편승하여 수천의 군대를 파견하여 곧바로 폭동을 진압하여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1884년에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받아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했던 김옥균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이 때도 청의 군대는 친일파를 철저히 탄압했다(갑신사변).
약간의 병력밖에 보유하지 못한 조선은 청에 진압을 위한 출병을 요구했고 일본도 갑신사변후 청과 합의에 따라 군대를 파견하였으며, 일-청 양군이 충돌하여 일-청 전쟁이 시작되었다.
Ⅶ. 향후 일본 역사교과서왜곡의 대책 방향
정부와 시민단체는 왜곡된 교과서 채택을 저지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우선 중국과의 연대가 필수적이며, 북한 또는 식민지 상태를 경험한 여러 나라와 연대할 필요가 있겠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목표로 하고 있는 일본에는 도덕적 측면에서 치명타이니만큼 국제사회의 여론을 확산시켜나가야 한다. 더욱이 역사교과서 검정 결과를 분석하여 일본 정부에 수정을 요구하는 일도 병행해야 한다. 당장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꾸준하게 우리의 의사를 그들에게 각인시켜야 한다. 감정을 앞세우는 극단적이고 즉흥적인 방법보다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대응이 효과적이다.
또한 영토문제와는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일본 내의 양심세력과의 협조가 더욱 조직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시점이다. 교과서의 사실적 기술은 일본 내 양심세력의 줄기찬 투쟁에 의해 이루어졌다. 학계, 민간단체, 지자체 구성원 등 각 세력간의 연합이 절실하다. 적극적으로 ‘교과서 바로 익히기’ 홍보를 통해 왜곡된 교과서 채택을 저지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Ⅷ. 결론
우리는 한일 양국의 갈등과 반목을 주체적이고 상호 평등한 화해와 협력의 선린관계로 발전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그 첫 걸음은 불행한 과거 역사의 기억에 대한 화해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일본에는 침략의 역사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자기학대로 매도하면서 제국의 영광을 다시 재현하려는 “새역모”과 같은 극우세력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과거와 지금의 차이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새역모”의 배후를 봐주던 산케이요미우리신문 같은 대형 메스미디어와 미쓰비시상사 같은 재벌, 심지어 일본정부까지도 이제는 드러내 놓고 역사왜곡을 지원획책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당시 한국과 일본 시민사회의 연대로 인해 교육현장에서 후소샤 교과서 채택이 좌절되자 왜곡세력들이 개헌과 재무장, 그리고 역사 기억의 왜곡에 반대하는 일본과 우리 시민사회 사이의 국제적 연대에 틈을 내기 위한 묘책으로 독도와 역사교과서문제를 동시에 들고 나오는 전략을 구사하는 데 있다. 영토문제로 두 나라 시민사회 사이에 민족주의라는 고압전류가 흐르게 해 연대에 금이 가게 함으로써 채택률을 높이려는 것이 그들의 속셈인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왜곡 교과서가 교육 현장에서 단 한권도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왜곡세력이 파 놓은 민족주의의 덫을 피해 다시 한 번 더불어 살기를 꿈꾸는 일본의 시민사회와 힘을 합쳐야만 한다. 왜냐하면 두 나라 시민사회의 국제적 연대가 왜곡세력이 꿈꾸는 세상 을 가로막는 가장 파괴력이 큰 무기이자 두려워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남의 잘못을 나무라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결함을 살펴야 하는 법. 반면교사로서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을 둘러싼 일본 내의 내전을 보면서 우리도 국사교과서를 반성적비판적 입장에서 성찰해야만 함을 절감한다. 왜냐하면 우리도 타자와의 공존을 지향한다면, 지난 고난의 역사에서 배태된 저항민족주의에서 기인하는 배타성과 우월의식 같은 우리 안의 특수를 어떻게 남의 눈을 감당할 수 있는 일반적인 문제로 환원시킬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만 하는 시기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미찌가미 히사시, 한국을 모르는 한국인, 일본을 모르는 일본인, 도서출판 무한, 1999
* 신용철, 역사를 속이면 역사에 속는다 : 일본의 역사왜곡과 사실의 연구, 우석출판사, 2001
* 송영심, 일본의 역사왜곡 21가지, 산호와진주, 2005
* 일본교과서바로잡기운동본부, 문답으로 읽는 일본교과서 역사왜곡, 역사비평사, 2001
* 일본 교과서 검정·채택을 대비한 교육자료집,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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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12.06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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