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사회 건설을 꿈꾼 지방인, 호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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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새로운 사회 건설을 꿈꾼 지방인, 호족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호족의 개념
3. 호족의 대두배경과 유형
4. 호족연합정권설
5. 호족과 국왕의 정치적 관계, 귀부
6. 호족세력과 결합한 여타 세력
7. 호족과 신라 및 후삼국과의 관계
8. 맺음말

본문내용

는 몰락하고 호족 세력들은 왕건을 중심으로 재결집된 것이다.
견훤은 신라 중앙 정부의 관리이자 군인으로 신라의 관직 체계 속에서 성장하여 한반도 서남 지방의 호족 세력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견훤은 궁예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호족 세력을 취합하고 정권을 유지하는데 정책적인 시도가 취약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 결과 호족 세력과 국왕과의 정치적 결속이 느슨하게 되었고, 호족간에도 계열화가 지속되었으며 결국 왕위 계승 시점에까지 연결되어, 광주지역의 호족 세력이었던 신검계 외척 세력과 전주 일대의 지방 세력이었던 금강계 외척의 왕위 쟁탈전에 휘말려 국왕의 지위를 탈취 당하고 결국 후백제가 멸망하는 과정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왕건 가문은 신라말에 새롭게 등장한 해상세력으로서, 송악군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고있던 호족이었다. 왕건은 궁예치하에서 군사활동에서 많은 무공을 세우면서 군사활동을 전개한 지역의 호족들과 연결을 맺었다. 909년부터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는데, 그의 세력을 살펴보면 비신라계로서 대체로 고구려 출신자로 구성되어 고구려 계승의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골품제도 밖에서 해상무역이나 군사적 재능, 지적 능력에 의해 새롭게 성장한 세력이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평민이었다. 해상세력과 상인세력도 포함되어 있어 이들의풍부한 경제력이 막대한 군사력을 유지, 강화할 수 있게 하여 후삼국통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왕건세력에는 문인, 선사들이 포함되어 있어 문인들은 고려초 왕권강화와 유교정치의 구현에 기인하였고, 선사들은 왕건과 호족들을 연결시키고, 후삼국통일 전쟁의 이념을 제시하였다. 왕건은 고려 건국 이전부터 호족 세력 포용 정책을 통해 호족의 귀부를 적극적으로 시도하는 한편 호족의 이탈을 방지했다. 왕건의 대표적인 호족 세력 포용 정책은 혼인 정책, 사성 정책, 사심관제, 기인제이다.
혼인제도는 호족 세력과의 직접적인 결속 관계를 맺기 위한 목적에서 실시된 것이며, 사성정책은 호족 세력과의 간접적인 혹은 상징적인 혈족 관계를 설정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행된 것이며, 사심관제는 호족 세력의 지방 근거를 인정하는 동시에 간접적인 지방 통제력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에서 마련된 것이며, 기인제는 개경에 호족 세력의 자제들을 밀집시켜 호족의 이탈을 막는 동시에 호족의 자제에 대한 우대를 보장하면서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에서 실행한 것이다. 왕건은 이들 정책을 통해 많은 호족 세력들을 결집할 수 있었고 그러한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건국할 수 있었다.
8. 맺음말
이상으로 나말여초 시대의 중요한 정치·경제·사회 세력이었던 호족이 어떤 세력이었는지에 대한 개념과, 등장 배경과 유형, 호족과 여러 세력과의 관계 등 호족세력과 나말여초의 사회변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처음부터 호족 세력들이 전면적으로 신라와 신라 중앙 정부를 부정했다고는 판단하지 않는다. 아마도 신라 부정의 정점은 호족 세력의 성장과 신라의 퇴락의 수준이 맞물리는 시점에서 호족 세력은 신라를 배제하고 독자적인 지배력을 유지해 나갔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호족은 연합 혹은 정복의 논리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고 보여진다. 궁예견훤과 호족 세력과의 관계와 왕건과 호족과의 관계를 상호 고려하면서 단기간의 세력화와 장기적인 세력화의 결과를 비교해보고 언제라도 분리될 수 있는 호족 세력에 대한 왕건의 정책적 노력이 고려를 건국하게 만든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고려초기 호족 세력은 강력한 왕권 강화의 의지 앞에 해체의 과정을 겪는다. 그들 앞에는 중앙과 지방이라는 두 가지의 기로가 놓여있었는데, 이는 더 이상 자신들의 선택을 바탕으로 국왕의 결정을 얻는 관계가 아니라 국왕의 결정에 자신들의 선택이 종속되어 버리는, 또한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성향이 국왕에 의해 계산되어 버리는 수준의 기로였다. 따라서 이들은 더 이상 전 시대 기준의 세력화를 도모할 수 없었고 고려라는 새로운 정치 체제에 의해 재편되고 세력은 계열의 정도로 남게되면서, 일부는 중앙에서 문벌이나 관료로 개편된 세력화를 시도하고 일부는 기존의 근거를 중심으로 지방 사회의 세력화를 시도하게 된다.
나말여초의 호족 세력은 각자의 정치적 지향점을 가지고 세력화의 장정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들은 사회 전반의 조건에 의하여 연합 혹은 정복의 과정에 개입되어 최초의 정치적 지향점 역시 변화, 좌절, 성취 등의 부침에 접어들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부침이 곧 나말여초의 사회변동이었다. 그들 호족 세력은 나말여초의 사회 변동을 주도한 세력이었다. 호족 세력의 존재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 사회는 재도약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입장에 따라서는 상대적이기는 하나 퇴락한 신라를 꺾고 새로운 고려를 세우는 그 일선에 호족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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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6.30
  • 저작시기2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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