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에피쿠로스
1) 쾌락설의 물리학적 배경
2) 에피쿠로스의 쾌락 원리
3) 개인의 쾌락 대(對) 사회적인 의무
2. 스토아
1) 지혜와 통제
2) 스토아학파의 인식론
3) 모든 실재의 기초로서의 물질 / 4)만물에 내재하는 신
5) 숙명과 섭리 / 6) 인간의 본성 / 7) 윤리와 인간의 연극
8) 자유의 문제
9) 세계주의와 정의
3. 회의주의
1) 감관은 기만적이다
2) 도덕률은 회의를 일으킨다
3) 지적인 확실성 없이도 가능한 도덕률
1) 쾌락설의 물리학적 배경
2) 에피쿠로스의 쾌락 원리
3) 개인의 쾌락 대(對) 사회적인 의무
2. 스토아
1) 지혜와 통제
2) 스토아학파의 인식론
3) 모든 실재의 기초로서의 물질 / 4)만물에 내재하는 신
5) 숙명과 섭리 / 6) 인간의 본성 / 7) 윤리와 인간의 연극
8) 자유의 문제
9) 세계주의와 정의
3. 회의주의
1) 감관은 기만적이다
2) 도덕률은 회의를 일으킨다
3) 지적인 확실성 없이도 가능한 도덕률
본문내용
말들이 나오는 것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따라서 한 설명이나 명제가 있을 때 그 반대되는 설명이나 명제도 같은 힘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람이 내는 어떤 말이든지 그들은 판단을 보류한다.
그러나 그들은 사유활동과 토론을 쉰 것은 아니다. 또한 그들 자신이 "실제" 세계 내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섹스투스는 "우리는 현상들에 대해 정당한 경의를 표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심지어 일상생활의 실천 덕목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회의주의자가 현상을 부정한다는 말에 대하여 오히려 "그들은 우리 학파의 이론을 잘 모르는 사람인 것 같다"고 말한다.
그들은 단지 눈에 보이는 대상이 "그대로 실재 속에 있는가"를 궁금해했다. 현상을 문제 삼지 않고 "현상에 대한 설명"을 문제삼는다. 그들이 현상에 대하여 논하는 것은 독단론 회의주의가 생각하는 독단은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의 무분별함을 지적하고자 한 것이다.
그들이 물리학에 접근한 이유는 물리학의 회의주의적 접근을 배우기 위함이었다. 윤리학과 논리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마음의 평정을 추구하기 위해 사유하기를 거부하는 "판단 중지", 예를 들어 "상반되는 사물들을 대응시키는" 활동 등은 하지 않고, 능동적인 사유활동과 토론을 하였다.
회의주의자들은 탐구에 있어서 명백한 것을 탐구하는 것과 명백하지 않은 것을 탐구하는 것을 나누었다. 특히 명백하지 않은 것을 탐구할 때 결론을 내리는 것을 조심해야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명백하지 않은 일들에 대한 진리를 결정할 신뢰할 만한 기준을 아직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1) 감관은 기만적이다
"감관 인상sense impressions"은 상황에 따라 다른 정보(설명)을 주기 때문에 그것의 본질에 대한 지식의 참·거짓을 밝힐 수 없다.(감관 인상은 명백하지 않다.)
2)
"불가항력적인 지각"에 의해서 도덕률이 검증되어도, 그것은 눈에 보이는 사실일 뿐, 우리의 생각이 참이라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도덕률은 명백하지 않다) 이는 나중에 윤리학의 판단 기준이 윤리적 상황에 도달했을 때에만 판단이 가능하게 만들어서, 윤리학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비판을 받는다.
3) 지적인 확실성 없이도 가능한 도덕률
명확성을 높인다면 도덕률을 사용할 수 있다. 명확성을 이르는 다른 말로 "개연성"이 있다. 확실하지 않은 만큼의 주의를 기울여 탐구의 창구를 계속 열어놓고 절대성을 의심하면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회의주의자들의 '체계'는 "독단 간에 의지하고 현상에 의존하는 많은 독단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다. 독단은 "분명하지 않은 명제에 대한 동의"이다. 회의주의자들의 '체계'는 "올바르게 사는 방법을 밝혀 주는 일련의 추론 과정"이다. 그리고 그들 자신들이 "일련의 추론에 의해 우리 나라의 관습과 법과 제도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본능적인 감정에 일치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참고]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새뮤얼 이녹 스텀프 · 제임스 피저 저, 이광래 역)
그러나 그들은 사유활동과 토론을 쉰 것은 아니다. 또한 그들 자신이 "실제" 세계 내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섹스투스는 "우리는 현상들에 대해 정당한 경의를 표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심지어 일상생활의 실천 덕목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회의주의자가 현상을 부정한다는 말에 대하여 오히려 "그들은 우리 학파의 이론을 잘 모르는 사람인 것 같다"고 말한다.
그들은 단지 눈에 보이는 대상이 "그대로 실재 속에 있는가"를 궁금해했다. 현상을 문제 삼지 않고 "현상에 대한 설명"을 문제삼는다. 그들이 현상에 대하여 논하는 것은 독단론 회의주의가 생각하는 독단은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의 무분별함을 지적하고자 한 것이다.
그들이 물리학에 접근한 이유는 물리학의 회의주의적 접근을 배우기 위함이었다. 윤리학과 논리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마음의 평정을 추구하기 위해 사유하기를 거부하는 "판단 중지", 예를 들어 "상반되는 사물들을 대응시키는" 활동 등은 하지 않고, 능동적인 사유활동과 토론을 하였다.
회의주의자들은 탐구에 있어서 명백한 것을 탐구하는 것과 명백하지 않은 것을 탐구하는 것을 나누었다. 특히 명백하지 않은 것을 탐구할 때 결론을 내리는 것을 조심해야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명백하지 않은 일들에 대한 진리를 결정할 신뢰할 만한 기준을 아직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1) 감관은 기만적이다
"감관 인상sense impressions"은 상황에 따라 다른 정보(설명)을 주기 때문에 그것의 본질에 대한 지식의 참·거짓을 밝힐 수 없다.(감관 인상은 명백하지 않다.)
2)
"불가항력적인 지각"에 의해서 도덕률이 검증되어도, 그것은 눈에 보이는 사실일 뿐, 우리의 생각이 참이라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도덕률은 명백하지 않다) 이는 나중에 윤리학의 판단 기준이 윤리적 상황에 도달했을 때에만 판단이 가능하게 만들어서, 윤리학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비판을 받는다.
3) 지적인 확실성 없이도 가능한 도덕률
명확성을 높인다면 도덕률을 사용할 수 있다. 명확성을 이르는 다른 말로 "개연성"이 있다. 확실하지 않은 만큼의 주의를 기울여 탐구의 창구를 계속 열어놓고 절대성을 의심하면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회의주의자들의 '체계'는 "독단 간에 의지하고 현상에 의존하는 많은 독단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다. 독단은 "분명하지 않은 명제에 대한 동의"이다. 회의주의자들의 '체계'는 "올바르게 사는 방법을 밝혀 주는 일련의 추론 과정"이다. 그리고 그들 자신들이 "일련의 추론에 의해 우리 나라의 관습과 법과 제도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본능적인 감정에 일치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참고]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새뮤얼 이녹 스텀프 · 제임스 피저 저, 이광래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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