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교회사-심창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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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세 교회사-심창섭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학을 세웠다.이 각 대학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성속의 권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투쟁을 많이 했다. 특히 교황권의 권력을 벗어나기 위해서 투쟁을 많이 하였다.(총회의 경우 상명하달식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학교의 발달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것은 중세기에도 없었던 것이다. 공립학교가 정부에 시녀노릇을 할 때, 부패하게 된다. 교육현장에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들어와서 학교를 간섭하게 되면 학교는 더 이상 발전할 수 없게 된다. 인간 교육, 신학교육을 위해서 공부시키는 곳이 신학교인데, 한국교회는 그러한 자유가 없는 곳이다.) 대학이 부패한 사회와 교회를 진단해서 고쳐나가는 역할을 중세시대에 일어났다. 대학생들은 대부분 미혼이었고, 주민들의 생활방식과 달랐다. 그래서 많은 마찰이 일어났다. 대학안에서는 도둑, 폭행, 강간, 살인도 있었다.
13세기 후반에는 대학 등지에서 많은 학생들이 곤경에 빠져 있을 때, 서로 도와주는 현상이 일어났고, 하숙비와 집 값이 오르자 학생들이 데모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요와 공급이 균형이 맞지 않아 어려운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자 자선가들이 나타나서 그들을 도와주었다.(칼빈의 경우에도 아버지의 친구의 집에서 공부하였다) 중세 대학의 이러한 개괄적인 모습에서, 대학은 학문의 도움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의식이 바꾸어지고 학문이 발달하고, 종교개혁으로 나아갔던 제3의 영향이었다. 나아가 근대의 문명을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만약 길드와 조합의 영향을 받아 대학이 형성되지 않았다면,(인도나 동양처럼 되었다면) 발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식발달과 학문이 발달하자 신비주의(Mysticism)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묵상, 고행 등을 통해서 신비체험을 주장하였다. 그 대표자가 聖버나드나 엑카르트이다. 성버나드의 경우, 그리스도와의(with Christ) 연합(Union)을 이야기하였다. 일반 사먀니즘에서는 하나의 결합을 이야기할 때, 하나의 융합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비주의는 자기의 의지가 있음에도, 자기의 의지는 말살되지 않고 하나님과 합일되는 것이었다. 신인합일, 신과 합일되어 지면서도 자기의 개체는 살아 있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해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스콜라식이 아니고 '믿게 때문에 이해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엑카르트는 도미니칸의 사제로 공부를 많이 했는데, 인간의 심층부의 영혼에서 신성의 탄생이 있다고 보았다. 결정적으로 신과 융합할 수 있는 것을 해석할 때는 Divine spark(하늘의 불씨)가 남아 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신성의 불씨로 말미암아 신과 합일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자기의 유한성을 벗어나 신성으로 충만케 됨으로 말미암아 신과 합일하게 되는 것이다. 엑카르트는 감동, 슬픔, 존경, 악에도 움직이지 않는 초자연적인 순수성을 신인합일의 특징으로 보았다.
그의 제자였던 Tauler, Suso 등 독일 중심의 신비주의가 라인강의 줄기를 따라 네덜란드로 올라간다. 그 중에서도 구르트(Grute)라는 사람이 '공동생활의 형제단(The common life of Brother)을 창설한다.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 루터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근대 경건주의로서 종교개혁의 뿌리에 영향을 미쳤다. 칼빈주의의 경건주의는 중세기에 일어났던 것을 알 수 있다.
중세기에 이러한 여러 가지 교회 정치적인 전통(Ecclesiopolitical Tradition)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캠브리지 대학의 Ullmann 교수가 이에 대해 2가지를 이야기했다. 권력의 구조가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으로 이해했다. 결국은 국민으로부터 올라가는 형태가 있고, 하나는 위에서 내려오는 형태가 있다고 보았다. 울만은 여기서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상향식의 구조는 이방문화에서 근거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나와 있는 세속정치의 형태로 보았다. 위에서 내려오는 하향식의 권력구조는 성직자들의 의식과 구조는 기독교의 원천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셨고, 하나님이 세운 왕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신정적 전통(Theocratic)
중세기는 대학교수들이 교황청을 회복하기 위해서 연 종교회의 같은 것은 권력이 상향식이었다고 보았고, 교황청들의 법들을 연구한 교회 법학자들(
그러나 옥클리는 교회정치야말로 신정적인 요소도 있지만, 중세기에도 밑에서 올라가는 경우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그레고리 1세와 7세는 모든 민중들이 원해서 올라간 경우이다.(egalitarian) 세속적인 정부도 일률적으로 국민으로부터 올라간 경우만이 아니었고 독재하는 황제의 경우 하향식이었다고 하였다.콘스탄틴 대제 이후에 기독교 공동구역의 이념을 가지고 기독교가 발전하고 붕괴하는 과정에서 세상의 권력을 가지고 행사하였다. 기독교가 이런 입장을 취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대리권자라는 Pre-eminent에 기초하였다. 종교적 권위가 힘의 체제로 발달되었다. 종교체제에서 권력 소스를① Bible로 보았다. 그리고② Church tradition이다. 그리고 ③역사적 사례들이었다. 이 3가지가 교회의 권위를 지탱해 주었다.
믿음이 이성을 짓누르는 상황 가운데서 모든 사회를 이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기에서 반기를 든 현상을 볼 수 있는데, 그 사람이 파리의 쟌과 마르실리우스이다. 파이의 쟌 같은 경우에는 지금까지 중세의 두개의 구조를 가지고 교황은 태양이고 황제는 달이라는 식으로 믿음이 이성을 짓누르는 것에 대한 이론을 반대하면서 "국가가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의 통치자로 여기지 않고, 국가가 최고의 통치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국가는 실제적이고 완벽한 정의가 있다. 왜냐하면 국가는 도덕적인 덕이 있기 때문에 국가 자체는 교황이나 신적 서임 없이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국가가 교회의 권위 위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평화의 수호라는 글을 통해서 "교회가 세속 권한에 너무 침투해 있기 때문에 국가가 불안하고 사회가 부패한다"고 하였다. 그 권력과 힘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사람, 민중에게 있다고 하였다. 민중이야말로 세상의 권한의 소스, 원천이라고 하였다.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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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4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89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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