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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교회사는 전 세계 어느 나라 교회사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세계 천주교 역사 이래 최초로 평신도들에 의하여 교회가 창립되는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7세기 말엽에 조선은 남인과 서인의 심한 당파싸움으로 파당을 지은 관료들과 왕후들에 의하여 정사가 좌지우지 되어 모든 정책을 펴는데 일희일비하며 자신과 자신이 속해있는 파당의 이익을 최우선시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청나라에 동지사로 오가던 선비들에 의하여 마태오 리치 신부님의 천주실의 라는 책자가 조선 사회에 유입되게 되어 당시 덕망 있는 선비들에게 읽히게 되고 특히 이벽 성조께서 책을 읽으시고 감명 받아 자신의 신앙으로 천주 하느님을 마음속에 각인하여 주위 선비들과 함께 주기적으로 천주교 신앙모임을 갖게 되면서 많은 선비들이 모여 천주 하느님을 경배하고 묵상하면서 한국천주교회가 태동하게 됩니다.
1777년도부터 시작된 일이며 처음에는 명자산 산자락 폐 사찰에 모여 강학회를 열어 하느님에 대한 토론을 하며 지내다가 후에 서울 명동성당 터 였던 당시 중인 김범우의 집을 명례방이라 명하고 그곳으로 옮겨 주기적으로 신앙모임을 갖게 되고 당시 신앙모임 회장에는 성 정하상 바오로 부친 정약종 성조였습니다.
이벽 성조는 이승훈에게 밀명을 내려 동지사 일행으로 청나라로 가서 정식 세례를 받도록 합니다. 1784년 이승훈 성조는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감격적인 세례를 받고 귀국하여 가성직자로서 여러 선비들에게 세례를 베풀게 됩니다. 이렇게 이벽 성조의 제자들이 속속 세례를 받고 전국 규모의 신앙단체가 조직되고 이존창 유항검등이 전주 내포 지역을 전교하는등 그 세가 대단하였습니다.
1794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님이 조선에 최초의 성직자로 오게 됩니다. 정조대왕은 개혁정책을 펴면서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등용하여 실사구시 정책을 폈는데 그 인재 들 중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인 분들이 많았습니다. 정조대왕은 서인을 멀리하고 남인을 중용하며 그 중에서도 천주교에 관대 했던 채제공을 중용하며 영의정까지 오르게 하자 같은 남인인 홍낙안이 그를 시기 질투하여 채제공이 가까이하는 분들이 정약용 정약종 정약전 이가환 권철신 등 당시 유능한 천주교를 믿는 대감들이였는데 그들이 제사를 소홀히하고 사교를 신봉한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1791년 신해교난이 일어나 많은 우리 신앙 성조들이 죽임을 당하고 귀양살이를 하게 되며 집안이 풍지 박산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조대왕은 그가 아끼는 인재들이 천주교 신앙인임을 알고 그 죄를 가볍게 다루었습니다. 그러다 1800년에 정조 대왕이 젊은나이에 갑자기 승하하고 순조가 어린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서인의 숨은 우두머리로 영조로 하여금 사도세자를 죽이게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그 작당 관료들과 하게 되고 수많은 음모로 정조 대왕을 죽이려고 했던 인물인데 정국을 손아귀에 넣자 평소 눈에 가시였던 남인세력과 개혁의 주도세력이였던 신진관료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천주교신자들을 박해하게 됩니다.
신앙 단체 명도회 회장이였던 정약종과 권철신 이벽 이승훈등 많은 성조들이 목숨을 잃게 되고 정약용 정약전등 대 학자들이 유배를 당하게 됩니다. 또한 정조에게 큰 벼슬을 약속 받았던 황사영 알렉시오는 능지 처참형으로 순교하고 그 아내 정 마리아는 제주도로 유배되어 힘든 생을 천주 하느님 성모님께 의탁하여 주위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며 천수를 누리고 선종하여 제주도에 고이 잠들어 있습니다. 이 박해가 1801년 신유교난이였습니다. 그러나 정순왕후는 5년 후에 급사하고 우리 신앙선조들은 박해를 피하여 산속으로 도망하면서 교우촌을 이루며 빛나는 교회사를 이어가게 됩니다.
신유교난 때 7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잃고 누이 정정혜 엘리사벳과 함께 어려운 처지에서 성장한 성 정하상 바오로는 조선 천주교회 발전을 위하여 주문모신부를 잃고 목자 없는 조선 천주교회에 새 목자 신부님을 영입하기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다하게 됩니다.
1777년도부터 시작된 일이며 처음에는 명자산 산자락 폐 사찰에 모여 강학회를 열어 하느님에 대한 토론을 하며 지내다가 후에 서울 명동성당 터 였던 당시 중인 김범우의 집을 명례방이라 명하고 그곳으로 옮겨 주기적으로 신앙모임을 갖게 되고 당시 신앙모임 회장에는 성 정하상 바오로 부친 정약종 성조였습니다.
이벽 성조는 이승훈에게 밀명을 내려 동지사 일행으로 청나라로 가서 정식 세례를 받도록 합니다. 1784년 이승훈 성조는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감격적인 세례를 받고 귀국하여 가성직자로서 여러 선비들에게 세례를 베풀게 됩니다. 이렇게 이벽 성조의 제자들이 속속 세례를 받고 전국 규모의 신앙단체가 조직되고 이존창 유항검등이 전주 내포 지역을 전교하는등 그 세가 대단하였습니다.
1794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님이 조선에 최초의 성직자로 오게 됩니다. 정조대왕은 개혁정책을 펴면서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등용하여 실사구시 정책을 폈는데 그 인재 들 중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인 분들이 많았습니다. 정조대왕은 서인을 멀리하고 남인을 중용하며 그 중에서도 천주교에 관대 했던 채제공을 중용하며 영의정까지 오르게 하자 같은 남인인 홍낙안이 그를 시기 질투하여 채제공이 가까이하는 분들이 정약용 정약종 정약전 이가환 권철신 등 당시 유능한 천주교를 믿는 대감들이였는데 그들이 제사를 소홀히하고 사교를 신봉한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1791년 신해교난이 일어나 많은 우리 신앙 성조들이 죽임을 당하고 귀양살이를 하게 되며 집안이 풍지 박산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조대왕은 그가 아끼는 인재들이 천주교 신앙인임을 알고 그 죄를 가볍게 다루었습니다. 그러다 1800년에 정조 대왕이 젊은나이에 갑자기 승하하고 순조가 어린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서인의 숨은 우두머리로 영조로 하여금 사도세자를 죽이게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그 작당 관료들과 하게 되고 수많은 음모로 정조 대왕을 죽이려고 했던 인물인데 정국을 손아귀에 넣자 평소 눈에 가시였던 남인세력과 개혁의 주도세력이였던 신진관료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천주교신자들을 박해하게 됩니다.
신앙 단체 명도회 회장이였던 정약종과 권철신 이벽 이승훈등 많은 성조들이 목숨을 잃게 되고 정약용 정약전등 대 학자들이 유배를 당하게 됩니다. 또한 정조에게 큰 벼슬을 약속 받았던 황사영 알렉시오는 능지 처참형으로 순교하고 그 아내 정 마리아는 제주도로 유배되어 힘든 생을 천주 하느님 성모님께 의탁하여 주위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며 천수를 누리고 선종하여 제주도에 고이 잠들어 있습니다. 이 박해가 1801년 신유교난이였습니다. 그러나 정순왕후는 5년 후에 급사하고 우리 신앙선조들은 박해를 피하여 산속으로 도망하면서 교우촌을 이루며 빛나는 교회사를 이어가게 됩니다.
신유교난 때 7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잃고 누이 정정혜 엘리사벳과 함께 어려운 처지에서 성장한 성 정하상 바오로는 조선 천주교회 발전을 위하여 주문모신부를 잃고 목자 없는 조선 천주교회에 새 목자 신부님을 영입하기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다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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