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대한제국기-1940년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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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근대사(대한제국기-1940년대까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의 행동강령으로 민중의 폭력혁명에 의한 조선혁명을 강조하여 일제·총독·친일파를 타도대상으로 보고 외교론·준비론을 비판했다. 이렇게 민족와해와 결합의 반복속에 1925 조선공산당이 창립되는데 김재봉의 코민테른의 승인으로 시작했지만 초기에 노농이 없는 허울에 불과했기에 지식인 머리로만 이루어졌다. 이는 20년대 사회주의운동의 한계로 일제공안에 의해 타도되며 재건되지 못하고 일본공산당에 예속된 것으로 존재가 부정당했다. 일부는 전향하기도 했지만 다시 사회주의로 돌아가 지하화되었다.
신국가건설을 위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가 민족통일전선으로 좌우합작운동이 전개된 때다. 국내는 3·1운동을 기점으로 1920년대 노농총동맹으로 단체가 미분화되었고 목표는 좌우가 함께하는 노농의 복지향상으로 조선노동공제회를 비롯한 생존의 문제에 집중했다. 이후 좌익이 적극투쟁을 주장하여 노농총동맹은 좌익화되었고 분파 움직임이 보이는데 이처럼 합작운동은 자체적인 이념이 부족한 것이 큰 문제이다. 하지만 통일을 이루기위해 합작이념 형성이 필요하며 이후 2차세계대전은 더 이상 이념전쟁이 아닌 파시즘과 반파시즘 대립에서 1940년대 반파시즘내의 미소대립으로 냉전이 이어진다. 이때 중요한 좌우합작단체가 1927년 신간회로 동아일보계열 타협적 민족주의자세력 강화로 안재홍 주도하게 다종교적이며 비타협적민족주의자·사회주의자가 결합했다. 또 여성신간회단체로 근우회도 있다. 신간회 강령은 애맺하지만 좌우단결로 친일과 타협적민족주의 즉, 기회주의 거부의사를 분명히했다. 당시 1.5구내 1개꼴로 있을 만큼 많은 사람이 가담했고 국민적 지지도 상당했다. 광주학생운동을 지원하는 등 자치와 일제 정책에 반대하였으나 지도자가 구속된 틈을 타 타협적민족주의자가 침투하였고 지도노선이 합법화·온건화로 경도하게 된다. 그래서 중앙과 지방 저항운동 불일치 등과 더불어 노선에서 해체론이 대두된다. 당시 신간회는 비타협 정치투쟁론을 주장하고 합법적 투쟁노선으로 일제 허용하에 이루어졌다는 모순에 봉착하여 투쟁결의에 비해 저항수준이 미미했다는 점이 한계이다. 게다가 노농운동과 같이 생존권 투쟁운동이 대부분이어서 구체적 활동방침이 결여되었다. 이에 내부결속력이 약하여 코민테른 해체지시로 외부조직의 충격에 의해 완전히 와해되어 여전히 물리적 통합에만 그치고 사상적인 통합의 한계 극복에 실패했다. 즉, 사회민족주의노선실패로 이후 좌우합작 노선의 숙명으로 1930년대 새로운 통합운동 양상을 보이게 된다. 이후 1928년 12월 태제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노농중심당의 성격으로 노농속으로 들어가고자 탈바꿈했다. 그래서 대공황시 대중의 혁명적 진출이 두드러졌다. 2차대전 직전 1935년 7월 코민테른7회대회반파쇼인민전선을 결성하여 양심적지주·자본가·소시민까지 제국주의 대항세력을 결집시키는데 이때 조소앙의 삼균주의와 시기가 맞아 떨어진다. 즉, 노농·소부르주아 3계급 동맹을 앞세워 혁명적 노농조합이 나타난다. 당시 통합의 분위기는 해외에서도 이어졌는데 반파시즘으로 통합을 위해 당대당으로 결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930년대 이후 사회주의자의 동향은 혁명적 대중노선도 있었고 1944여운형 중심의 조선건국동맹은 일본패망을 예견하여 군사 등 조직확대·해외 민족해방운동세력과 연결하는 등 해방이후를 준비하였다. 즉, 이념적 결합으로 이후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고 통일전선의 움직임은 해방전선 전부터 시도되었다 할 수 있다. 1940년대 상해임정 연합전선정부의 성격은 조선민족혁명당(의열단)과 한국국민당(김구)의 결합했다. 임정의 성격변화에 있어 가장 큰 변수는 사회주의·자본주의의 이념대립이었고 이에 조소앙의 삼균주의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조소앙은 보통선거제(정치균등)/토지국유화(경제균등)/국비교육제(교육기회균등)을 주장하여 손민의 국민주의에서 영향을 받는데 당시 통합이념체가 결성되어 통일국가방향의 시금석을 마련했다. 즉, 30년대 후반부터 민족운동의 통합기류는 조소앙의 뒷받침으로 가능했으며 더 이상 물리적인 좌우합작이 아닌 이념적 결합의 최초 시도였던 것이다. 그래서 조소앙의 한국독립당·김구 한국굼니당·김원봉의 민족혁명당이 합쳐 1939전국연한진선협회를 결성, 삼균주의는 사민주의 노선으로 1941 건국강령에 반영된다.
삼균주의의 신민족주의등장으로 차별을 분단 원인으로 보고 균등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통일국가·민족국가를 사민주의 노선에서 달성하려 했다. 반면 해외의 사회주의 핵심세력은 1941년 소련으로 간 김일성과 중국에 남은 김두봉계열이 주도하였다. 이전 김일성계열의 조선인민혁명군도 재만한인조국광복회10대강령에서 광범위한 반일통일전선수립으로 민족자치를 위해 노력했으나 농토주요산업기관의 국유화 등 사회주의 국가수립이 궁극적 목표였다. 하지만 1942화북조선독립동맹의 김두봉은 사회주의자지만 항상 좌우합작 통일전선을 생각하여 국제적인 민족통일전선 결성을 위해 동방각민족반파쇼대표대회를 열어 김구·여운형과 접촉을 시도했고 1945 조선민족대회 개최에 합의했다. 이때 비로소 이념적 합작까지 계획한 사민주의 노선으로 민족통일전선의 빛을 보려하나 일본의 패망으로 불발된다. 이처럼 우리는 민족운동해방군을 결성하여 연합군 파견을 준비했지만 미가입된 상태여서 전쟁종식으로 연합군 승인을 못받았고 일본패망의 결과가 겹쳐 미소군정기를 초래하게 된다.
신국가방향은 당시 자본주의·인민민주주의와 이를 통합한 사민주의로 합치되지 못했다. 특히 민족연합전선은 건국동맹·독립동맹·임정의 일부계열만 합작하여 사회주의 김일성·자본주의 이승만의 핵심세력이 불참하여 실질적 힘을 갖추기가 어려웠다. 이는 통일의지가 결여된 기본적인 문제였다. 하지만 국제사회변화 동태가 너무 커서 우리힘으로만 이겨내기 어려웠다. 해방이후에는 식민지 잔재세력 청산문제가 우선과제였으나 미소양군이 한반도로 들어와 친일vs반일의 문제가 해결되기도 전에 자본vs사회의 이념적 문제로 이행되었다. 따라서 자본주의계열(남한)에서 가장 먼저 청산할 대상이 친일동맹이 아니라 사회주의세력이었기에 냉전체제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한국전쟁 이후 남북이 분단되어 반쪽 국가로 여전히 민족해방운동 미완성 상태로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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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6.11
  • 저작시기2010.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5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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