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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노동자투쟁(근로자투쟁)의 평가, 노동자투쟁(근로자투쟁)과 한국경제, 노동자투쟁(근로자투쟁)과 공공부문노동자, 노동자투쟁(근로자투쟁)과 궤도노동자, 한일투자협정, 노동자투쟁(근로자투쟁)과 총파업, 울산 현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노동자투쟁(근로자투쟁)의 평가
1. 총파업 투쟁의 성과
2. 총파업 투쟁이 목표를 쟁취하지 못한 이유
3. 총파업 투쟁의 한계와 오류

Ⅲ. 노동자투쟁(근로자투쟁)과 한국경제
1. 70년대 :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2. 80년대 초 : 전두환 학살정권 아래 혹독한 노동탄압
3. 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노동운동의 새로운 역사를 열었다
4. 90년 초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시작되고 있었다
5. 96년 중반부터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Ⅳ. 노동자투쟁(근로자투쟁)과 공공부문노동자
1. 법률상 단체교섭권 확보
1) 법률상 단체교섭권 현황
2) 법률상 단체교섭권 쟁취
2. 사례
1) 전력노동자투쟁
2) 철도노조 민주화투쟁

Ⅴ. 노동자투쟁(근로자투쟁)과 궤도노동자

Ⅵ. 노동자투쟁(근로자투쟁)과 한일투자협정

Ⅶ. 노동자투쟁(근로자투쟁)과 총파업

Ⅷ. 노동자투쟁(근로자투쟁)과 울산 현대

참고문헌

본문내용

의 공단지대로 퍼져나갔다. 노동자들의 대투쟁은 전국으로 확산되었을 뿐 아니라 대기업에서 중소기업, 중화학업에서 경공업으로, 광공업에서 운수, 부두, 선원, 사무직, 전문직, 판매서비스직 등 전 산업으로 파급되었다. 8월 17일 울산 현대그룹 4만 노동자의 가두시위에서 정점에 오른 노동자 투쟁은 8월 22일 거제 대우조선의 이석규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뒤 더욱 격렬해졌다.
노동자들의 공세적 진출로 수세에 몰렸던 정부와 독점자본은 8월말 9월초부터 역공을 개시하였다. 자본가들은 권력과 언론을 방패삼아 노동조합 설립신고서를 빼앗고, 노동조합의 주요 간부를 강제로 납치하는가 하면, 심지어 폭력배인 파업깨기꾼을 동원하여 농성 노동자들을 강제 해산시키는 등 온갖 방업을 동원하여 민조노조의 설립을 방해하였다. 이 밖에도 정부는 자본가의 이해를 일방적으로 앞세우며 현대중공업, 대우자동차 등의 파업 현장에 경찰을 투입하여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7, 8월 거세게 타올랐던 전국의 노동자대투쟁은 8월 말부터 정부의 강경 탄압으로 점차 수그러들다가 9월 중순 무렵에는 거의 끝맺었다.
이 기간 동안 무려 3,337건의 쟁의가 일어났다. 8월 들어 하루에 400건이 넘는 쟁의가 일어났고, 20일에는 하루 500건, 29일에는 743건이 터지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은 절정에 이르렀다. 특히 종업원 1천 명 이상의 대규모 사업장 가운데 75.5%에서 쟁의가 일어날 정도로 노동운동은 널리 일어났다. 노동자대투쟁은 6.29선언의 허구성을 그대로 드러내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진출을 알리는 거대한 물결이었다.
투쟁의 특징·의의·한계를 살펴보면
① 전국 전 산업에 걸친 대규모 단기간 집중적 폭발 - 울산에서 시작해서 온나라를 들끓게 했던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한국전쟁 뒤에 벌이진 투쟁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노동자 1/3가량이 참가해서 3300건 남짓 벌인 투쟁에서 노동자야말로 생산의 원동력이며 사회 변혁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② 노동자 가운데 독점재벌 계열기업을 비롯한 대공장 남성노동자들이 경공업, 중소기업, 여성노동자 사업장 투쟁을 이끌었다. 지난날 중소기업과 여성이 많은 사업장에서 투쟁을 많이 벌인 것에 견준다면 커다란 변화였다. 이것은 앞으로 대공장이 노동운동의 요새로 탈바꿈할 토대가 마련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선진노동자에서 노동자대중으로 투쟁이 번지고 서비스 사무직 노동자들이 노동운동 대열로 들어오면서 노동운동의 폭이 더 넓어졌다. 나아가 노동자 가족들이 참여하는 일도 많았다.
③ 노동자들은 주로 파업을 무기로 삼았지만 곧잘 농성과 가두 시위로 나아갔다. 규찰대를 조직하고 구사대나 전투경찰 백골단 따위와 드러내놓고 싸우기도 했다. `노동쟁의 조정법\'의 쟁의 발생신고나 냉각기간 따위를 무시한 채 먼저 현장을 점거하고 파업농성을 한 뒤 나중에 협상하는 `탈법투쟁\'이 많았다. 이것을 두고 노동부 쪽에서는 노동자가 준법정신이 없어서(조선일보 1987년 8월 4일)라고 말했다. 하지만 노동자에게 냉각기간을 지키자고 말했다가는 돌팔매를 맞기가 십상(조선일보 1987년 8월 4일)이라는 노조대표자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노동자들은 이 법이 터무니없는 것임을 거의 본능으로 알고 있었다.
④ 마치 전국총파업을 벌이 듯 일어난 노동자 대투쟁은 노동대중이 생활에서 느끼는 여러 모순을 없애려고 스스로 싸움터로 나섰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대투쟁은 광범위한 노동자들을 단련시키고 의식과 조직을 발전시킨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노동자 대투쟁이 `인간적 대우\'부터 `임금인상\'과 `민주노조쟁취\'등을 요구조건으로 내건 경제투쟁이기 때문에 커다란 한계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대중파업은 경제적 영역에서 정치적 영역으로 또는 정치적 영역에서 경제적 영역으로 거의 느낄 수 없게 옮겨간다. 모든 정치행동의 물결 뒤에는 수많은 퇴적물이 남는데, 그 퇴적물 위에서 경제투쟁이 싹을 틔운다. 물론 거꾸로 일이 진행되는 수도 있다. 사실이 이렇다면 6월 항쟁이라는 정치행동 뒤에 노동자들이 생활에서 나타난 요구들을 내세우며 싸운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⑤ 6 29선언 뒤 중간층이 민주화투쟁을 멈추거나 뒤로 물러섰지만 노동자들이 투쟁에 앞장선 것을 볼 때 끝까지 투쟁할 세력은 노동자뿐이라는 사실이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힘과 단결의 의미를 자각함으로써 사회적 무력감이나 패배주의를 상당한 정도로 깨달을 수 있었다. 요즈음 노동자 계급을 제쳐두고 사회 `진보\'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난 날 역사에서 다시 배워야 한다. 또 개량을 마구 외쳐대는 사람이 있다면 아주 조그만 개량마저도 노동자 자신들이 투쟁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었던 87년 역사나마 곱씹어야 한다.
⑥ 대투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노동운동의 지도자나 활동가에 의해 계획되고 지도된 쟁의라기보다 일반 노동자의 자연발생적인 욕구분출에 따른 쟁의가 빈번하였다. 몇 사람의 제의에 수십명이 모여 곧바로 파업과 농성으로 들어가고 노동조합을 만들어 투쟁을 전개하는 경우가 흔했다. 일반 노동자들의 노동자 의식은 극히 초보적인 권리의식과 연대의식을 넘어서지 못하였으며, `외부세력\'의 개입에 대해 국가 자본의 논리에 함몰되어 매우 비판적이었다. 이처럼 조직적 지도력이 취약하였기 때문에 강고한 투쟁을 벌이고도 그것을 광범한 조직적 역량으로 결집시키지 못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노동운동에서 조직적 지도력의 중요성과 연대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⑦ 쟁의의 요구사항이 단위 사업장 내에서 임금인상에 집중(70%)되었고, 지역별 산업별 연대 통일 투쟁이 전면적으로 추진되지 못하였고, 나아가 민중운동과의 연대가 부족하였다.
참고문헌
굴강정규(1986), 노동운동론연구, 백산서당
김동춘(2001), 한국노동운동의 진로, 노동사회,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동춘(1995), 한국사회 노동자연구, 역사비평사
박준성(2009),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이야기, 이후
이종구 외(2006), 1960-70년대 한국 노동자의 계급문화와 정체성, 한울
정원현(2006), 2006년 노동자투쟁 : 정세와 과제, 경상대학교사회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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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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