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일교섭, 미국일본 교섭, 미일원자력협정, 헐노트]미일교섭(미국일본 교섭)의 형태, 미일교섭(미국일본 교섭)의 양국입장, 미일교섭(미국일본 교섭)과 미일원자력협정, 미일교섭(미국일본 교섭)과 헐노트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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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미일교섭, 미국일본 교섭, 미일원자력협정, 헐노트]미일교섭(미국일본 교섭)의 형태, 미일교섭(미국일본 교섭)의 양국입장, 미일교섭(미국일본 교섭)과 미일원자력협정, 미일교섭(미국일본 교섭)과 헐노트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미일교섭(미국일본 교섭)의 형태

Ⅲ. 미일교섭(미국일본 교섭)의 양국입장
1. 미국이 바라본 일본
1) 대일 유화정책
2) 루즈벨트 대통령
3) 코델 헐
2. 일본이 바라본 미국
1) 대동아 공영권 구상
2) 고노에 수상
3) 야마모토 이소로꾸

Ⅳ. 미일교섭(미국일본 교섭)과 미일원자력협정
1. 교섭과정
2. 정책결정과정

Ⅴ. 미일교섭(미국일본 교섭)과 헐노트

참고문헌

본문내용

통령에게 직접 보고하고, NSC에서 대통령의 참석 아래 교섭방침이 결정되었다. 교섭에 관련한 미국측의 정책결정은 관련 성청의 의견조정에 의해 교섭정책이 결정된 일본과는 달리, 국무성과 NSC가 중요한 정책을 결정했다.
한편, 국무성과 NSC가 주된 정책을 결정한 미국과는 달리, 일본의 정책결정과정에는 다양한 관련기관이 참가하였다. 전술한「이원체제적 이익연합」의 두 중심 성청인 과기청과 통산성은 물론, 원자력위원회 및 외무성도 교섭에 관계하였다. 국내 재처리를 우선시하던 과기청과 해외 위탁처리를 중시하던 통산성은 교섭과정에서 이견을 드러냈다. 전력업계를 관할하는 통산성으로서는 재처리교섭의 실패로 영, 불에 위탁 처리하던 재처리마저도 미국이 승인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 양 성청의 의견 대립을 중재한 것이 당시 원자력의 국제교섭에 깊이 관계하고 있던 원자력위원회였다. 원자력위원회는 외무성에 원자력과가 신설되기 전 중요한 원자력의 국제교섭에 관여하여 왔으며, 원자력위원회 위원이 재처리교섭의 대표를 맡기도 했다. 외무성은 교섭의 창구로서 교섭에 참가하였지만, 독자적으로 원자력 외교를 전담할 수 있을 정도의 전문성을 갖추고 있지 않았으므로, 교섭과정에 있어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4개의 관련기관이 교섭에 주로 관여하였지만, 교섭의 성격상 과기청과 원자력위원회가 정책결정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즉 과기청이 교섭방향 설정의 중심이 되고, 원자력위원회가 교섭의 지휘를 맡는 형태였다. 그러나 일본측의 정책결정은 관련 각 성청의 합의가 우선시되는 방향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정책과정은 일본측 교섭자의 정책 선택지의 폭(winset)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점에 관련하여서는 협정개정교섭을 포괄하여 VI장에서 구체적으로 논할 것이다.
Ⅴ. 미일교섭(미국일본 교섭)과 헐노트
헐 노트의 주된 내용
1. 중국과 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의 무조건 철수
2. 삼국동맹의 사문화(死文化)
3. 중국의 장개석 정부를 지지
일본과 미국은 양국의 국교조정(國交調整), 중일전쟁의 처리, 일독이 삼국동맹, 대일금수문제(禁輸問題) 등을 협의하지만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문서를 받게 된다. 당시 주미 일본대사였던 노무라와 구르스대사에게 헐 노트가 전달 된 것이었다. 헐 노트라는 것은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코델 헐에 의해서 작성된 문서로써 그 내용은 당시 일본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으며 일본 내에서는 치욕적이다. 라고 할 정도였다.
이 문서를 계기로 도죠 내각은 아직 미국과의 전쟁을 본격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기존의 방침을 180도 선회하여 미국과의 전쟁을 결심하게 된다. 한편에서는 미국이 이 문서를 일본에게 넘겨주며 이미 미국 수뇌부가 일본의 공격을 예감했다. 즉 미(美)국민의 전쟁참여 반대여론을 돌려놓기 위해 일본에 대한 강경책을 내 놓고 일본이 공격을 감행하게 만들어 미국의 2차대전 참전을 결정하도록 만들었다. 라는 음모론을 주장한다. 전시 징병제를 놓고 미 의회에서 표결에 붙였을 때 2표차이의 근소한 차로 통과 된 것을 보면 확실히 당시 미국은 전쟁참여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음모론에 대해서는 진주만기습 이후 일본으로부터 제해권(制海權)을 되찾는데 걸린 2년여의 시간과 인적, 물적 피해규모 등을 고려해 볼 때 다소 무리가 있는 주장으로 보인다.
이처럼 일본은 일미교섭 전까지 미국에 대한 전쟁은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 해 놓고 외교적 타협을 통해 대동아공영권을 구체화 시키려 했고 고노에 수상과 진주만 기습의 주도자였던 야마모토 이소로꾸조차 미국과의 전쟁은 무리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미국의 헐 노트에 명시된 조건은 일본으로 하여금 미국에 대한 항복이냐 아니면 미국과의 결전이냐 하는 갈림길에 서게 만들었고 결국 일본은 미국에게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기습공격이다라고 주장한 이소로꾸의 주장을 받아들여 진주만 기습을 하게 된 것이었다.
참고문헌
◈ 김근제, 개전전의 미일 교섭시말에 관한 연구, 경희대학교, 1970
◈ 성황용, 미일교섭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1964
◈ 양기웅, 미·일의 통상정책 및 교섭전략,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1994
◈ 안종철, 3·1운동, 선교사 그리고 미일간의 교섭과 타결,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7
◈ 전진호, 미·일 교섭의 정책결정과정, 서울대학교 국제학연구소, 2000
◈ 전진호, 미일 원자력 국제협력 : 로카쇼무라 재처리시설 가동을 중심으로, 현대일본학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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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19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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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62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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