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념, 의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원정책, 군사정책,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교육정책,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정책,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일정책,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전쟁정책 분석
본 자료는 7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해당 자료는 7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7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념, 의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원정책, 군사정책,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교육정책,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정책,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일정책,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전쟁정책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념

Ⅲ.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의의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원정책

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사정책

Ⅵ.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교육정책

Ⅶ.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정책

Ⅷ.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일정책
1. 강압책
2. 회유 이간 책동

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전쟁정책

Ⅹ. 결론

본문내용

8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대통령 교서」를 발표하였다. 이 교서에서 그동안 해외에서 벌인 자신의 독립외교 활동에 대해 언급한 뒤, ‘정부의 應行方針’을 논하면서 먼저 행정을 쇄신할 것을 밝히고, 재정 확보책에 대한 협조를 당부하였다. 또한 외교원을 후방에 파견하여 독립외교를 계속적으로 추진할 뜻을 밝히면서 독립전쟁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我의 성공의 결국은 武力에 재하고 무력의 승리는 준비에 재한 지라. 아국의 현금 형편으로는 대략 民兵制를 채용함이 可할 지니 국내국외에 일반 인민이 각기 소재지에서 직업에 종사한 여가에 兵事를 연습하며 무기도 가급적 각자 求得하였다가 시기를 乘하여 정식 宣戰으로 일제 快戰할 지며, 각지에 교통기관을 완실히 조직하여 동서 내외에 연락이 源源하며 聲氣를 상통하여 隔膜의 歎이 無케 함이 최후 決戰을 행하기에 필요하며 … 아국의 독립운동은 정의 인도를 주장하여 강포 무도한 적을 伐함에 在하니 혹 개인이나 단체가 敵國人에 대하여 비인도적 행동이 없기를 주의할지라.
이승만도 독립전쟁 준비 방략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준비는 정부 차원의 조직적 준비가 아닌 개개인 각자의 준비였으며, 敵國人에 대한 非人道的 행동을 자제할 것을 권유함으로써 炸彈을 사용한 의열투쟁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일제의 통치권 거부투쟁, 작탄을 사용한 의열투쟁, 무장 독립군의 조직화 및 체계화를 통해 독립전쟁을 준비했던 임시정부의 독립전쟁 방략과 모순되는 노선이었다. 말하자면 이승만의 외교 노선은 임정의 시정방침에서 기대했던 독립전쟁을 위한 외교와는 성격이 달랐다고 하겠다.
1921년에 접어들면서 임시정부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가 모두 상해를 떠났으며, 독립운동 방략의 통일에 힘썼던 안창호조차도 임정을 떠났다. 이로 인해 1921년 이후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기관으로서의 위상이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0년에 채택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방략은 큰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독립전쟁 준비를 위한 보다 구체적인 작업이 추진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1922년 국무총리 대리 신규식의 시정방침 연설과 한국노병회 결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 신규식은 1922년 3월 20일 제1회 의정원 회의에서 내무군사교육교통사법재정외교 등 7개 부문에 걸쳐 시정방침에 대해 연설하였다. 여기서 그는 자치론이나 위임통치론을 배격하고 ‘완전 독립절대 독립’을 추구한다고 하였으며, 사관 양성과 民軍 훈련, 그리고 각지의 독립군을 조직화하여 독립전쟁 시 동원 가능하도록 할 것임을 밝혔다. 그는 1920년에 확정된 독립전쟁 준비 방략론을 기본적으로 계승하고 있음을 표명한 것이다.
1922년 11월 임시정부에서는 한국노병회를 결성하여 독립전쟁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시행하였다. 勞兵이란 ‘독립 생계를 영위하는 勞工的 技術을 겸비하는 軍人 자격자’를 말하는데, 한국노병회는 10년 내에 勞兵 1만명과 100만원의 戰費 마련을 목표로 하였다. 목표가 달성되었을 때에는 ‘이사회의 제의와 총회의 결의로서 독립전쟁을 개시한다.’고 하였다. 이 계획은 1920년의 시정방침에 비해 소략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독립전쟁 방략의 구체성과 현실성에 있어서 진일보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1920년의「시정방침」은 독립전쟁이라는 목표 하에 가능한 활동들을 종합하여 나열하는 수준이었다. 독립전쟁을 언제 어떠한 방법으로 개시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처리하여, ‘미일전쟁’등과 같은 대외적 변수를 기대하면서 준비한다는 성격이 강하였다. 그런데 한국노병회의 계획은 독립전쟁 수행 조건을 주체적 관점에서 파악하고, 10년이라는 기한을 명시하여 독립전쟁 실천 의지를 보다 명확하게 표현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은 1926년 1월 1일 병인의용대를 조직하였다. 병인의용대는 적 시설을 파괴하고, 일본 제국주의 관리와 제국주의 주구배인 韓奸을 습격암살하고, 임시정부를 보위하기 위한 비밀결사 조직이었다. 말하자면 의열투쟁을 수행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그런데 병인의용대는 한국노병회를 주축으로 구성되었으며, 한국노병회는 1932년까지, 병인의용대는 1933년까지 조직을 유지하고 활동을 계속하였다. 또한 한국노병회는 공개적인 단체였고, 병인의용대는 비밀결사 조직이었다. 두 조직은 서로를 대체하는 조직이 아니라 병립하면서 상호 협력할 수 있는 연계 조직이었다. 이 점에서 병인의용대 결성을 독립전쟁준비 방략에서 의열투쟁 방략으로의 변화로 파악하기 보다는 임시정부의 독립전쟁 방략에 따라 의열투쟁을 전개하면서 독립전쟁 준비를 계속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Ⅹ. 결론
임시정부는 수립 이후 국내와 해외 동포사회를 통할하기 위한 체제정비에 착수하였다. 우선 국내행정을 직접 장악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연통부와 교통국을 설치하였다. 즉 교통부 소관의 교통국과 내무부 소관의 국내행정기구인 연통제는 비밀조직으로 국내와의 연락, 자금의 조달, 정부의 명령전달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런데 이같은 기구만으로는 해외동포사회 전체를 통할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각 지역의 한인을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편입시키기 위한 체제가 요구되었다. 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 이미 한인자치조직으로 활동하고 있던 단체들을 임시정부 체제 내에 편입시켜야 할 필요성도 대두되었던 것이다. 임시정부는 이러한 문제를 직할조직의 운영으로 해결하고자 기획하고 거류민단(교민단)제도를 도입하였다. 이는 일종의 지방행정단체적인 조직으로서 각지에 산재해 있던 한인사회를 임시정부 산하에 장악시킬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였다.
참고문헌
- 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좌우합작운동, 한울, 1995
- 이연복, 대한민국 임시정부 30년사, 국학자료원, 1999
- 이현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정책과 광복군, 역사실학회, 2000
- 이현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정책과 그 실제, 동국대학교사학회, 1986
- 이용중,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위와대일항전에 대한 국제법적 고찰, 대한국제법학회, 2009
- 채희옥,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교육정책에 관한 연구, 한국교원대학교, 2001
  • 가격9,000
  • 페이지수21페이지
  • 등록일2013.07.24
  • 저작시기2021.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65390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