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놀이문화(놀이)의 어원, 놀이문화(놀이)의 필요성, 놀이문화(놀이)의 심리적 태도, 놀이문화(놀이)와 유아놀이, 놀이문화(놀이)와 청소년놀이, 놀이문화(놀이)와 화전놀이, 놀이문화(놀이)와 본산대놀이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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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놀이]놀이문화(놀이)의 어원, 놀이문화(놀이)의 필요성, 놀이문화(놀이)의 심리적 태도, 놀이문화(놀이)와 유아놀이, 놀이문화(놀이)와 청소년놀이, 놀이문화(놀이)와 화전놀이, 놀이문화(놀이)와 본산대놀이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놀이문화(놀이)의 어원

Ⅲ. 놀이문화(놀이)의 필요성

Ⅳ. 놀이문화(놀이)의 심리적 태도
1. Agon(시합)
2. Area(도박)
3. Mimicry(흉내)
4. ilinx(모험)

Ⅴ. 놀이문화(놀이)와 유아놀이
1. 2세유아
1) 특징
2) 놀이감
2. 3세유아
1) 특징
2) 놀이감
3. 4세유아
1) 특징
2) 놀이감
4. 5세유아
1) 특징
2) 놀이감

Ⅵ. 놀이문화(놀이)와 청소년놀이

Ⅶ. 놀이문화(놀이)와 화전놀이
1. 놀이 공론
2. 택일
3. 통문
4. 시부모님(舅姑)
5. 음식 준비
6. 몸치장
7. 나들이
8. 화전 굽기
9. 유흥
10. 귀가

Ⅷ. 놀이문화(놀이)와 본산대놀이

참고문헌

본문내용

디어 산천과 친구들에게 이별을 고하고 다음 해를 다시 기약하면서 아쉬움을 달래며 귀가하게 된다.
Ⅷ. 놀이문화(놀이)와 본산대놀이
양주(楊州)골에서는 이백년 전부터 해마다 주로 사월 파일과 오월 단오에 한양 사직(社稷)골 딱딱이패(백정, 상두군, 건달로 구성되었다고 한다)를 초청해 산대놀이를 놀게 하였는데, 그들은 지방순연(地方巡演) 기타로 공연 약속을 어기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불편을 느낀 나머지 양주골에서 신명이 과한 자들끼리(주로 관아의 하리배 즉 아전) 사직골 딱딱이패를 본떠 가면 기타를 제작하고 실연한 결과 그 성과가 나쁘지 않아 의외의 성과를 거두고 그 뒤부터 발전시켜 내려온 것이 양주별산대놀이이며 당시의 중심 인물은 이을축(李乙丑)이라는 사람이며, 그는 양주의 최초의 가면제작자라고도 전한다.(故 徐貞柱 및 故 金成大 談)
인용문에 의하면, 사직골 딱딱이패는 백정, 상두군, 건달로 구성되었고 지방 순회공연을 다니는 전문적 놀이패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서울의 백정은 바로 반인이었고, 반인들 가운데 전문적 놀이꾼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사직골의 본산대놀이도 반인들이 주축을 이루었을 것이다. 사직골과 가까운 육조(六曹) 앞 즉 지금의 정부종합청사 근처에도 반인들이 운영하던 현방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 육조 앞 현방의 반인들은 당시 천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살던 사직골 근처에 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상두군과 건달이 본산대놀이에 참여한 것은 후대의 현상으로 보인다.
정조 9년(1785) 왕명으로 성균관에서 편찬한 태학지(太學志)에 반인과 나례도감과의 관련을 보여 주는 기록이 발견된다.
(가) 숙종 29년 계미년(癸未年, 1703년)에 유생이 영접도감에서 주관하는 잡희를 보는 것을 금하고, 범한 자는 삼년 동안 과거의 응시를 정지시키라 명했다. 매번 북사(北使)가 올 때를 당해 조정에서 나례도감을 설치해 창우들을 모아 산붕(山棚)을 배설해 맞이했다. 이에 이르러 대사성 김진규(金鎭圭)가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에 거리에서 도성사람들이 물결처럼 달려가는 것을 보았는데 사자(士子)가 또한 많이 가서 보니 선비가 자중치 못함이 이와 같습니다. 마땅히 금제(禁制)가 있어야 합니다.”라고 하므로 임금의 이 명령이 있었다.
(나) 영조 12년 병진년(丙辰年, 1736년)에 임금이 유사에게 성균관 입직관(入直官)의 죄를 다스리고 태학의 두 장의(掌議)를 모두 과거의 응시자격을 정지시키라고 명했다. 이때 반인들이 산붕(山棚)을 설치해 반촌 내에서 놀이를 베푸니 임금이 듣고 이 명령이 있었다.
(가)에 의하면, 중국사신이 올 때 조정에서는 나례도감을 설치하고 창우들을 모아 산붕(山棚)을 배설해 맞이했다. 그런데 (나)에 의하면, 반인들이 반촌 내에서 산붕을 설치하고 놀이를 연행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중국사신 영접시에 나례도감에서 창우들을 모을 때, 당연히 산붕을 설치하고 놀던 반인들도 동원했을 것이다.
한편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 형전(刑典) 금제(禁制)와 영조실록 가운데도 다음과 같이 반인에 대한 중요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다) 성균관 공자 사당 근처에서 반인의 무리가 설붕(設棚)하고 잡희를 벌였다. 실로 이는 전에 없는 해괴한 짓이다. 그 때 재임(성균관에 기숙하던 유생의 임원)은 얼마 동안 과거에 응하지 못하게 벌을 내리고, 당일 숙직관은 즉시 잡희를 금하게 하지 못하고 당상에 알리지 않았으므로 붙잡아서 심문하고 죄를 주었다.
(라) 이보다 앞서 호유(湖儒)의 상소에 반인이 성묘(聖廟) 가까운 곳에 설붕(設棚)하고, 거재 유생(居齋儒生)이 가서 관람했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거재 유생을 죄주고 성균관의 관원은 잡아다 조처하며 당상관은 추고(推考)하도록 청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다)와 (라)는 영조 12년(1736)의 일로서, 앞에서 인용한 태학지의 예문 (나)와 동일한 사건을 다룬 기록이다. 반인들은 국가적 행사인 중국 사신 영접 행사에도 동원되었지만, 이와 같이 시정에서 ‘설붕잡희(設棚雜戱)’의 공연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나)에서의 “설산붕”(設山棚)이나 (다)(라)의 “설붕”(設棚)은 꼭두각시놀이의 무대를 설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의 산붕이나 붕은 산처럼 큰 무대인 산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강이천(姜彛天, 1769-1801)이 남대문 밖에서 봤던 놀이를 읊은 한시 <남성관희자(南城觀戱子)>의 앞부분은 꼭두각시놀음이고, 뒷부분은 가면극인데, 꼭두각시놀음에서 무대를 가설하고 놀이판을 벌인다는 내용(設棚爲戱具)이 보인다. 1872년 정현석이 엮은 교방가요의 “곽독 설붕희목인(郭禿 設棚戱木人)”이라는 기록에서도 꼭두각시놀이의 무대를 붕(棚)이라 표기하였다. 그러므로 <남성관희자>의 놀이꾼들이 꼭두각시놀이와 가면극을 함께 공연한 것처럼, 반인들도 꼭두각시놀이와 가면극을 함께 공연한 것이다.
유득공의 경도잡지 권1 성기(聲伎) 조에는 나례도감에 속하는 연극에 꼭두각시놀이와 가면극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연극에는 산희(山戱)와 야희(野戱)의 두 부류가 있는데, 나례도감에 소속된다. 산희는 다락을 매고 포장을 치고 하는데, 사자, 호랑이, 만석중 등의 춤을 춘다. 야희는 당녀(唐女)와 소매(小梅)로 분장하고 논다.
여기에서 산희는 다락을 매고 포장을 치고 연행한다는 설명으로 보아 포장무대 안에서 공연하는 꼭두각시놀이임이 드러난다. 야희의 소매, 당녀는 현존 가면극에도 등장하는 배역이다. 결국 산희와 야희는 꼭두각시놀이와 가면극으로서 반인들의 공연종목과 일치하고 있다.
참고문헌
도날드 위니캇 저, 이재훈 역(1997), 놀이와 현실, 한국심리치료연구소
백승호(2007), 종교교육을 위한 청소년 놀이문화 활용 방안, 전북대학교
이중구(1997), 한국적 놀이문화 공간의 개념모형 설정에 관한 연구, 경기대학교
임은정(2012), 나는 놀이의 주인공, SOLID
Jeffrey Trawick-Smith 저, 신혜영 외 2명 역(2007), 아이들을 사로잡는 상호작용 놀이지도, 다음세대
Saralea E. Chazan 저, 유미숙 외 2명 역(2012), 놀이 프로파일, 시그마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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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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