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 전략, 정당화, 대중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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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국주의 - 전략, 정당화, 대중의 반응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들어가며>

사료 1. [영국] 조지프 체임벌린(Joseph Chamberlain)의 연설
- 1894년 1월 22일, 웨스트 버밍햄 빈민구제연합(West Birmingham Relief Association) 행사에서

사료 2. [미국-분석] 앨버트 베버리지(Albert Beveridge)의 1900년 1월 9일, 상원 연설

사료 3.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對 해군 연설, 1897년.

사료 3. [분석] 빌헬름 2세의 ‘세계정책’과 민족주의

사료 4. [벨기에] 레오폴드 2세(Leopold Ⅱ)의 연설
- 1876년 9월 12일, 국제 지리학자대회(International Conference of Geographers)에서

사료 4. [분석] ‘중립국’ 벨기에의 제국주의

사료 5. [이탈리아] 페르디난도 마치니(Ferdinando Martini)의 『Cose Africane』, 1897.

사료 5. [분석] 이탈리아 제국주의의 조바심

<나가며>

본문내용

국 에티오피아 제국에 속해 있던 마사와(Massaua) 항구를 점령하여 1885년 이탈리아의 첫 식민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허인 지음, 『이탈리아사』, 대한교과서주식회사, 2005 , 261쪽.
하지만 삼국동맹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크리스피 1887~1891년, 1893~1896년에 걸쳐 이탈리아 수상을 역임.
는 삼국동맹을 다시 갱신하여, 발칸 및 아드리아 해 지역에서 동맹국 중 어느 한 국가가 영토를 확장할 경우 상호 배상할 것, 이탈리아가 북아프리카에서 현상 유지를 위해 전쟁을 일으킬 경우 독일은 이 전쟁에 동맹조건을 확대 적용할 것 등과 같은 군사 협정을 독일과 체결하게 된다. 이로 인해 1888년~1889년에는 막대한 군비를 부담해야 했고, 이 협정에 관한 이야기가 확산되면서 프랑스와의 통상이 중단되어 이미 국제적인 경제 위기를 맛보아야 했던 남부 농업과 이탈리아 경제 전반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크리스피는 호전적인 외교정책을 피고, 경제적인 문제를 경시했기 때문에 산업부문에 대한 투자가 줄어들고, 무역이 줄어들면서 이탈리아 경제는 한층 더 상황이 악화되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의 무역 총액은 1881~1887년에 평균 4억 4천 4백억만 리라였던 것이 1888~1889년에는 1억6천5백만 리라로 감소했다. 크리스토퍼 듀건 지음, 김정하 옮김, 『미완의 통일 이탈리아사』, 개마고원. 2001, 235쪽.
자국의 경제상황이 전반적으로 악화되는 이 시점에서 이탈리아는 다른 열강에게 뒤쳐져 있다는 것에 점점 더 조바심을 느끼게 된다. 이런 조바심은 사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사료에서 보면 이탈리아의 인구를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과 계속 비교하면서, 이탈리아의 세력의 확장이 더딘 것에 대한 열등감과 위기감을 계속 강조하면서,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빨리 식민지 확보에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산업혁명 발달을 위한 열악한 조건인, 황폐한 국토와 식민지의 윤택한 토지를 비교하면서, 이탈리아의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는데 식민지의 자원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도 자국의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이라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전형적인 식민지 획득의 정당화 논리가 나오는 것이다.
<나가며>
지금까지 서구 5개국의 사료를 통해 각국의 제국주의 전략과 정당화 논리, 대중의 반응에 관해 살펴보았다. 흥미로운 것은 정당화 논리로 자국의 경제발전, 식민지의 문명화 등이 공통적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런 논리가 당시 적극적인 제국주의 정치가들뿐만 아니라 대중에게도 상당 부분 동의를 얻고 있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사회적 다윈주의와 인종주의에서 자유로운 서구인은 많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나라마다 제국주의에 대한 태도가 조금씩 다르며, 특히 선발 주자들과 후발 주자인 벨기에, 이탈리아 사이에는 큰 차이가 보인다는 것도 눈여겨 볼만하다. 뒤늦게 산업화를 시작한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은 원료산지와 상품시장 개척을 위한 식민지 개척에 뛰어들었으나, 이미 이전부터 팽창정책을 추진하였던 국가들이 식민지를 선점함으로써 대외 팽창 정책에 어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아직 국력이 약해 함부로 국력이 강한 국가들의 비위를 거스를 수 없기에, 그들은 먼저 국가 내부 안정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벨기에 레오폴드 2세의 경우 식민통치를 위해서 국내외의 여론을 모으려고 노력했으며, 이탈리아 마치니의 경우는 국력을 키워야 함을 역설하며 우선 국내 통일을 위해 노력했다. 마치니는 ‘청년 이탈리아 당’을 만들어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에는 실패했다.
나름대로의 전략으로 선진 제국주의 국가들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19세기말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이 제국주의 경쟁의 시기에, 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팽창이 불러올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을까? 체임벌린은 식민장관을 맡은 직후 이렇게 말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사회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식민지의 개발뿐이다. 충분한 일자리가 있어야 국민들은 만족할 것이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기존의 시장을 발전시키는 것 이외에 충분한 일자리를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Gulley, 앞의 책, p. 303.
1914년 7월, 뇌졸중으로 병상에 누워 있던 체임벌린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후 몇 시간 후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같은 달,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 참고 문헌
1. 영국
박지향 지음, 『제국주의 : 신화와 현실』,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0.
Gulley, Elsie E. 지음, 『Joseph Chamberlain and English Social Politics』, Octagon Press, 1974.
Smith, Simon C. 지음, 이태숙김종원 옮김, 『영국 제국주의, 1750~1970』, 동문선, 2001.
Wikipedia 영어판, 표제어 ‘Joseph Chamberlain'
2. 미국
권오신 지음, 『미국의 제국주의 : 필리핀인들의 시련과 저항』, 문학과 지성사, 2000.
Biographical Directory of the United States Congress

Wikipedia 영어판, 표제어 ‘Albert Beveridge'
3. 독일
권형진 지음, 『독일사』, 대한교과서주식회사, 2005.
마이클 휴즈 지음, 강철구 옮김, 『독일 민족주의 1800-1945』, 명경, 1995.
마틴 키친 지음, 유정희 옮김,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독일사』, 시공사, 2001.
4. 벨기에
아담 호크쉴드 지음, 이종인 옮김,『레오폴드 왕의 유령』, 무우수, 2003.
5. 이탈리아
허인 지음, 『이탈리아사』, 대한교과서주식회사, 2005.
크리스토퍼 듀건 지음, 김정하 옮김, 『미완의 통일 이탈리아사』, 개마고원,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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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9.19
  • 저작시기2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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