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산 김원봉, 강제 연행, 징용 및 징병 등으로 인한 재일 한국인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약산 김원봉, 강제 연행, 징용 및 징병 등으로 인한 재일 한국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며 토목 공사와 같은 힘들고 일본에서 충원하기 어려운 노동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같은 시기에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징용과 함께 징병도 이루어졌다. 태평양 전쟁으로 전선이 넓어짐에 따라 부족한 병력을 조선인으로 충원한 것이다. 1938년 시행의 육군 특별 지원병령으로 1943년 일본군 내 조선인 병사는 1만 7066명이 있었다. 1943년에는 학도 출진이 있었는데 일본 대학생이 10만 명 이상 투입 되었고 이에 발 맞춰 조선인 학생도 같이 징병되었다. 그리고 1942년 5월, 1944년부터 조선인에게 징병제를 실시하겠다는 조선 총동부의 발표가 있기도 했었다. 그렇게 모집된 조선인 군인은 해방 당시에 각종 계급과 각 군에 걸쳐 약 36만여 명이 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는 당시 일본군의 10% 이상에 해당하는 숫자에 이른다. 그리고 그와 함께 ‘여자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동원되어 끌려 간 조선인 여성의 숫자 또한 대단히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2) 해방 후 그들의 삶
우선 징병으로 끌려갔던 군인들의 상황부터 언급해야 할 것인데 1953년 5월 시점에서 복귀자 및 복귀 예정자가 24만여 명, 생존 예상 및 생존 확실이 10만 5천여 명, 사망 및 사망 확정이 1만 6천여 명에 달한다는 조사가 나왔었다. 해방이 된지 8년 후임에도 불구하고 10만이 넘는 사람이 생사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일본 정부의 조선인 군인의 전후 처리는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그 외의 징용 등으로 끌려온 조선인들의 해방 직후의 대응은 역시 대부분 귀국으로 귀결 되었다. 재일 조선인들은 일본의 패망 직후 귀국을 위해 일본의 전국 각지에서 우리나라와 가까운 항구들로 몰려들었다. 해방 시기의 징용 등을 통해 온 조선인과 재일 조선인의 수는 1945년 봄에 210만 정도로 추정된다. 그리고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 후 약 반년의 시간 동안 140만 명이 귀국을 한다. 그리하여 1946년 봄에는 약 50만 정도의 조선인만이 일본 본토에 남게 된다. 이들이 쉽게 귀국하지 못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꼽아보자면 다음과 같다.
-조국의 정세를 파악, 일단 상황을 살피겠다는 마음
-당시 대부분의 재일 조선인이 남쪽 출신이었는데 미군정 치하의 남한은 정치적 혼란과 함께 경제적, 사회적 혼란까지 가중
-현금 1000엔, 화물 250파운드 이상을 가지고 귀국하는 것을 금지, 이는 생활 기반이 없는 조국으로 귀국하느니 차라리 일본에 남아 삶을 꾸려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였다.
당시 해방 직후의 재일 조선인의 상황은 생활의 대부분을 자기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생활의 어려움과 더불어 전쟁 직후 사회적인 분위기 또한 그들이 살아남기 힘든 상황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극도로 어려운 삶을 이어가야만 했으며 일본 정부의 배척 또한 극복해야 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그 후 징용 노동자나 징병으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에 대한 배상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한일 협정 당시 보상금으로 지급되었던 금액 대부분을 국가에서 마음대로 써버렸고 징용, 징병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은 개개인이 각자 자신을 고용했던 회사나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피해를 보상받으려 노력하고는 있으나 이 또한 매우 어려운 일이며 현재까지도 이러한 보상 문제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3. 느낀 점
불특정 다수의 머리 안에서 기억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조사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약산 김원봉 선생이건 징용 노동자건 간에 아직도 제대로 된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고 고작해야 몇 권의 책과 자료들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해방 전후의 어지러웠던 한반도 안에서 그들은 그들의 자리를 어느새 빼앗기고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사라져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고 재조명 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 중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도덕적,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는 시기에 자신의 근본을 찾는 것이 그러한 혼란의 하나의 해결 방편이 될 수 있음을 다들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그 사람들은 사라진 그림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들에게 역사의 재조명이 언제쯤 이뤄질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라는 사람 하나라도 그들을 잊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고
김원봉 연구(창작과 비평사, 1992)
약산 김원봉(실천문학사, 2005)
약산 김원봉 평전(시대의 창, 2008)
재일 한국인의 역사(역사넷, 2007)
위키백과
네이버 백과사전
  • 가격1,2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13.10.01
  • 저작시기2013.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83905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