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와 신라의 고고학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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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백제와 신라의 고고학 비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백제와 신라의 역사
1-1) 백제
역사
고고학적으로 관찰한 백제의 역사
1-2) 신라
역사
고고학적으로 관찰한 신라의 역사

2. 고분
2-1) 백제고분
2-2) 신라고분

3. 건축
3-1) 백제 성
3-2) 신라 성

4. 불상
4-1) 백제 불상
4-2) 신라 불상

5. 탑
5-1) 백제 탑
5-2) 신라 탑

6. 과학
6-1)백제 과학
6-2)신라 과학

7. 참고문헌

본문내용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584)에 금당을 짓게 되었다.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바램의 9층 목탑을 짓게 되는데,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645년에 완공되었다.
이와 같이 황룡사는 93년간에 걸친 국가사업으로 조성된 큰 절이었으며, 신라의 3가지 보물 중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제외한 2가지 보물이 황룡사 9층목탑과 장육존상이었다는 것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땅이 곧 부처가 사는 땅'이라는 신라인들의 불교관이 잘 나타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없어져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늪지를 메워서 그 위에 지은 황룡사는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1탑식 배치였다. 그러나 장육존상과 목탑 등이 조성된 후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이 배치되는 1탑 3금당식으로 바뀌고, 탑의 좌우에 종루와 경루(經樓)가 대칭을 이루어 배치되었다. 또 사방은 복도와 같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독특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종루에는 거대한 종이 있었는데, 몽고가 침입했을 때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1976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에서 금동불입상·풍탁·금동귀걸이·각종 유리 등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높이 182㎝에 이르는 대형치미는 건물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금당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다고 전하며, 목탑지에서 발견된 당나라 백자항아리는 당시의 문물교류를 잘 알 수 있게 한다.
6. 과학
6-1)백제 과학
칠지도
칠지도(七支刀)는 몸체에 6개의 가지가 붙어 있는 독특한 모습을 한 칼로서, 생김새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전투에서 직접 사용했던 무기라기보다는 위세품(威勢品)의 하나로 소장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 혹은 귀신을 쫓는 벽사(邪)의 의미가 담긴 물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싶다. 칼의 길이는 대략 74.4㎝이며, 현재 일본 나라현 텐리[天理]시의 이소노카미[石上] 신궁(神宮)에 보관되어 있다.
칠지도의 몸체에는 금상감(金象嵌)기법을 사용하여 연원 등을 밝혀주는 글자를 새겨 넣어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데, 아쉬운 점은 글자 중 일부가 훼손되어 판독(判讀)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명문에 대한 판독이 최초로 시도된 1874년 이후 거의 1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명문(名文) 전체에 대한 명쾌한 해석을 내리는 데 있어 상당한 이견(異見)들이 존재한다.
몸체의 앞뒷면에 새겨진 명문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우선 앞면에는 칼의 제작 연대와 제작 방법 및 기능 등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으며, 뒷면에는 백제의 왕이 왕세자를 통해 왜왕(倭王)에게 칼을 전달하면서 후세까지 전승하고 보여주라는 글로 마무리하고 있다. 따라서 명문의 내용으로 볼 때, 칠지도는 분명 백제왕의 명령을 받은 기술자가 칼을 만들어 왕세자를 통해 왜왕에게 전달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백제의 왕은 무엇 때문에 칠지도를 만들어 왜왕에게 전달하였을까? 이 물음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현재로서는 내릴 수가 없지만, 당시 동아시아에서 백제가 누리고 있던 국제적 지위를 생각한다면 간접적으로나마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을 듯하다. 즉 왜(倭)가 중앙 집권 국가로서 성장하게 되는 배경에는 당시 외교 루트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간 많은 백제의 학자 및 장인 집단들이 있으며, 이들은 고대 일본에서 직접적으로 백제의 우수한 문물과 기술을 왜에 전달하였고, 왜인들은 이를 바탕으로 국가 형성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아마 칠지도 역시 이러한 역사적 과정 속에서 일본으로 전해졌던 백제 물품의 하나로 보인다. 따라서 당시 일본으로 건너간 칠지도는 백제의 문화적 선진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물품으로 그 역사적 의미가 매우 깊다고 할 수 있다.
6-2) 신라 과학
청성대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으로 높이는 9.17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길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占星術)이 고대국가에서 중요시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국가의 큰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는 첨성대 건립의 좋은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7. 참고문헌
한국고고학회, 2008;한국고고학강의, 서울 : (주)사회평론
이남석, 2002;백제의 고분문화, 서울 : 서경 출판사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07;백제의 건축과 토목, 서울 : 도서출판 아디람
권오찬, 2001;신라의 빛, 서울 : 글밭출판사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고려답사회 편, 2012;한국 문화유산 산책, 서울 : 새문사
국립중앙박물관, 1999;백제, 서울 : 통천문화사
문화재청
구글
네이버지식백과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최태성, 2011;큰별쌤 최태성의 한눈에 사로잡는 한국사 전근대편, 서울 : 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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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7.14
  • 저작시기20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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