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세력과 종교 [신라하대 종교계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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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지방세력과 종교 [신라하대 종교계 동향]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머리말

Ⅰ. 신라하대의 종교계의 동향
 1. 신라
 2. 궁예

Ⅱ. 후삼국시대의 종교
 1. 신라
 2. 궁예
 3. 왕건

Ⅲ. 후삼국통일 전후기의 종교
 1. 왕건과 불교의 관계
 2. 왕건과 풍수지리설의 관계

맺음말

본문내용

의 길흉화복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사상이다.
홍승기, 1996「고려 초기 정치와 풍수지리」『고려 태조의 국가경영』
은 신라말기 선종의 유행과 함께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유행되었던 것으로서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러한 풍수지리설은 보통 道詵과 관련되어 설명 되어지는바 도선은 선종계통의 승려로서 선문구산파 가운데 하나인 동리산파의 개조 惠哲의 인가를 받아 전남 광양의 옥룡사에서 독자적인 선문을 개설하고 있던 사람이다. 최병헌, 1975「도선의 생애와 나말여초의 풍수지리설」『한국사연구 11』
도선이 王建家와 관련을 맺게 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이 장에서는 도선과 왕건의 관계, 나아가서 고려 창건 이후 왕건과 풍수지리설에 대해서 조명하고자 함이므로 도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생략토록 하겠다.
(前略) 그 뒤 신라의 정치와 교화가 점점 흐려져서 위태하고 멸망한 조짐이 있었다. 대사가 천명을 받아 특출한 자가 있을 줄 알고 간간이 松岳郡에 가서 놀았다『白鷄山玉龍寺贈諡先覺國師碑銘序』
(도선이 세조와 함께) 鵠嶺에 올라가 산수의 (中略) 大原君子의 足下에 올립니다라고 하였다.『高麗史』,高麗世系所引,『編年通錄』
이후 우연의 일치일지 몰라도 여하튼 왕건은 도선의 예언대로 삼한을 통합한 임금이 되었다. 다음으로 고려의 창건 이후 왕건은 풍수지리설을 이용한 정치를 펴는 데 있어서 주목할 것이 서경천도론과 후백제지역 지세배역론이라 하겠다. 홍승기, 1996「고려 초기 정치와 풍수지리」『고려 태조의 국가경영』
우선 서경천도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왕이 여러 신라들에게 이르기를 (中略) 상제 식렴과 광평시랑 열평을 보내어 이를 지키게 하고 佐 45명을 두었다.『高麗史節要 1』, 太祖 元年 9月
이는 군사적인 이유로서 여진인을 비롯한 북방민족에 침입에 대비해야 하는 것 하현강, 1988「고려시대의 서경」『한국중세연구사』
도 있지만
국내의 도전세력을 제압하고 왕위를 다지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앞의 사료에서 “평양의 고도”라 하여 평양에 대한 왕건의 열망을 상정할 수도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당시의 정세상 갑작스런 천도는 불가능 하였으나 평양이 대도보후로 지정된 지 얼마 되지 않아 西京으로 바뀌었다는 점은 왕건의 서경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지대하였는가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근자에 서경은 완전히 수보하고 민호를 옮겨 이곳을 채운 것은 지력에 의지하여 삼한을 평정하고 장차 여기에 도읍하기를 바랐던 바이다. 高麗史 2, 世家, 太祖 15年 5月 甲申 諭示
이는 서경의 지력의 도움을 기대하여 천도할 뜻이 있었음을 비추는 대목이다. 평양이 고구려의 옛 수도임은 모두가 주지하는바 왕건은 국내 정세의 안정을 통하여 일단 확보된 영토에 대한 지배력 강화의 측면으로 볼 수 있겠다. 또한 후세에 훈요십조(5조)를 전하여 서경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다.
후백제지역 지세배역론과 관련해서 훈요십조 8조에는 “車峴 이남 錦江 밖은 山地의 형세가 모두 거슬리는 방향으로 달리고 있으니, 그곳의 인심도 또한 그러 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을 등용하여 권세를 쥐게 하면 혹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라 하여 이 지방에 대한 강력한 적대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에 대하여 정리를 해보자면 금강의 흐름이 활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시위를 당겼을 때 화살이 겨누는 방향이 개경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점을 이용해서 왕건은 후백제지역에 대한 배역론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사료를 통해 검토해보면 풍수지리설은 왕건의 정치적 의도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홍승기, 1996「고려 초기 정치와 풍수지리」『고려 태조의 국가경영』
집권에 있어서의 지지기반의 확보, 반란에 대한 사전 차단 등은 모두 왕건의 정치적 의도라 할 수 있으며 이는 풍수지리설이 고려 초기 왕건에게 어떠한 의미로 사용되었는가를 알 수 있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는 나말여초 시기를 구성하여 영향력을 행사했던 주요 세력들인 신라ㆍ궁예ㆍ왕건ㆍ견훤과 종교와의 관계를 알아보았다. 특히 불교와 이 주요세력들과의 관계는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시대적 혼란과 새로운 시대에 대한 욕구는 민중들과 유력 지방세력들이 동요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였고, 미륵신앙 또는 선종의 등장은 이들의 행동을 지지해주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따라서 이들의 독자적인 세력규합에 있어 종교, 특히 불교와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이번 발제에서는 시기별로 나누어 동시대의 지방세력들이 어떻게 종교와 관계를 맺으며 세력을 규합해 나갔는지에 대한 논의에 초점을 맞추어 발제를 하였다. 이를 통하여 이들 세력과 종교와의 관계에서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고, 세력 간의 독자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새로운 시대를 열기위한 욕구는 사상적인 변화와 진보에서 초래되는 것이며 행동할 수 있는 원동력 또한 종교가 사상적인 지지기반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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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기, 1996「고려 초기 정치와 풍수지리」『고려태조의 국가경영』
최병헌, 1975「도선의 생애와 나말여초의 풍수지리설」『한국사연구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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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8.24
  • 저작시기2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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