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운 최제우의 철학과 사상 [동학사상 등장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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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수운 최제우의 철학과 사상 [동학사상 등장배경]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동학사상의 등장 배경

2. 최제우

3. 최시형

4. 손병희

5. 참고자료

6. 동학농민운동의 배경

7. 동학농민운동의 전개과정

8. 동학농민운동의 지향점

9. 동학사상과 동학농민운동의 관계

본문내용

나 거절당했다. 그동안 전봉준의 봉기에 반대 입장을 보였던 손병희는 교주 최시형의 승인 하에 10만여 명의 충청도 농민군(북접)을 이끌고 청산에 집결하여 논산에 합류했다. 그로써 김개남 대신 음력 10월에 북접의 손병희가 논산에서 합류하여, 남접 10만 명, 북접 10만 명 등 총 20만여 군세를 이루었다. 이들 남북연합 농민군은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해 일본군의 병참기지를 습격하고 전신줄을 절단하면서 서울을 향해 북상하다가 공주를 총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사기가 오른 농민군이 충청도의 공주성을 에워싸고 전쟁을 시작하였으나 결과는 패배하였다. 수적으로 우세한 농민군도 막강한 일본군의 화력을 이길 수 없었고, 2500명의 관군과 200명 일본군의 우수한 무기를 감당하지 못해 우금치에서 패아였고, 공주에서도 패한뒤 논산에서 마지막 결전을 벌였지만 무너지고 말았다. 이에 최시형은 해산령을 내렸고 최시형을 비롯하여 손병희, 김연국, 손천민 등은 강원도 홍천으로 향하였고 이들은 강원, 충청도를 오가며 이후 4-5년 동안 숨어지냈다. 이로써 동학 농민군의 조직적인 싸움은 끝이 났고 많은 동학 지도부가 잡혀 갔다. 전봉준 또한 배신자의 밀고로 순찬에서 잡혀 처형되었고 흩어진 농민군들은 화적이 되기도 하고, 부자들을 털어 가난한 자를 돕는 활빈당이나 영학당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이 간직한 척왜정신은 훗날 의병운동으로 이어진다. 또한 손병희 등 뒷날 동학교단을 다시 일으켜 천도교로 교명을 바꾸고 근대개혁운동과 항일민족 운동에 헌신하였다.
3. 동학농민운동의 지향
1) 경제적 지향
농민들의 경제적 지향은 무엇보다도 조세 수취제도인 삼정을 바로잡는 데 있었다. 집권층과 지방관리의 제도적 또는 불법적인 조세수탈을 중지하라는 것에 집중되었다. 말하자면 당시대의 경제적 모순을 총체적으로 철폐하여 가혹한 수탈로부터 벗어나게 해 달라는 절박한 요구였다.이러한 요구는 개화파 정권의 갑오개혁에서 상당 부분 수용되었다.
다음으로 농민들은 상업문제의 개선을 요구하였다. 주로 관과의 결탁을 통하여 특정 물건에 대해 독점권을 행사하는 도매상인 도고의 철폐, 영세한 상인에 대한 지배층의 수탈금지, 농촌의 영세한 행상들의 활동보장 등이 있다. 즉 영세한 상인층의 기본적인 활동권과 생계유지 보장을 요구한 셈이다. 그러나 농민혁명이 좌절된 후 일본상인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진출해오면서 영세 상인의 상업활동은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에는 그 기반이 송두리째 붕괴되었다.
2) 사회적 지향
사회적인 문제의 개혁요구는 신분제의 폐지에 집중되었다. 물론 신분제를 철폐하라는 공식적인 요구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농민혁명 과정에서 양반 지주에대한 처벌을 단행하였고, 양반 사족에게 모욕을 주거나 복수하였고 노비는 노비 문서를 태워 자신의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이에 대하여 지배층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고 동학군의 눈아래는 정부도 없다는 비난도 받았다. 신분제도 폐지 요구는 결국 갑오개혁에 반영되어 신분제는 1894년 6월 28일 군국기무처의 의안을 통해 법적으로 철폐되었다.
3) 정치적 지향
정치적 문제에 관한 농민군의 직접적인 요구는 민씨정권의 축출과 탐관오리의 제거였다. 여기서 더 나아가 정치적 지향의 큰 줄기는 외세 축출이었다. 3월 봉기 때부터 외세 축출의 문제를 제기하였는데, 이때는 서양인 선교사와 일본상인 등으로 한정되어 있었지만 일본군이 궁궐을 점령하고 청일전쟁을 도발하며 내정 간섭을 심화하면서 일본군을 대상으로 전면적인 반외세 항쟁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농민군의 반외세 항쟁은 조선정부와 군대까지 장악한 일본군, 그리고 농민군을 더 위험시하여 일본군에 동조한 기득권 세력의 공격에 밀려 좌절되고 말았다.
4. 동학사상과 갑오농민운동과 관계
동학 사상과 갑오농민전쟁의 관계를 보는 세 관점이 있다. 첫째는 동학사상을 갑오농민전쟁의 모체로 보는 관점이며, 둘째는 동학사상을 갑오농민전쟁의 종교적 외피로 보는 견해, 셋째는 양자의 관련성을 무시하는 경향이다.
사실 갑오농민전쟁 과정에서 교단 상층부는 무력 봉기를 반대하였다. 다시 말하면 교단 내부에 사회적 실천을 보는 두 관점이 있었다. 이런 점은 동학사상의 이중 구조에서 나온다.
갑오농민전쟁 당시 농민군의 구성은 ‘진짜 동학당’ ‘임시 동학당’ ‘거짓 동학당’ 으로 나눈다. 그 가운데 ‘진짜 동학당’은 동학사상에는 밝지만 사회 변혁을 위한 실천에 일정한 거리를 두는 종교적 지향이 강한 집단이다. 또한 ‘임시 동학당’ 은 보신을 위하여 잠시 동학에 붙었던 기회주의자들로서 농민군이 패하자 바로 양반 토호들에게 붙었던 집단이다. 그리고 ‘거짓 동학당’ 은 농민군의 주축을 이루어 사회 변혁의 주체로 나섰던 대다수 민중을 가리킨다.
앞에서 말한 동학사상의 이중 구조는 그 실천 주체가 ‘진짜 동학당’ 과 ‘거짓 동학당’ 이다.
‘진짜 동학당’ 은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교단 지도부로서 갑오농민 전쟁이 일어나기 전 정부를 상대로 종교박해를 중지하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무력 봉기를 반대하고 이를 벌하려고 하였다. 사실 최제우도 종교로서 동학을 세웠으며 억지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바뀌는 ‘무위이화(無爲而化)’를 강조하였다. 그래서 관념적 또는 종교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자 하였고 개인의 수양을 통해 모든 변화를 실현함으로써 사회 문제까지도 개인 윤리 측면에서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거짓 동학당’은 갑오농민전쟁을 통해 역사의 전면에 나섰던 대다수 민중과 그들을 이끌었던 남접의 지도부로서 그 속에는 자신들의 사회적 실천을 실현시킬 도구로 동학사상을 이용하려 한 사람들도 있고 동학사상을 믿으면서 그 사상의 참 모습이 사회적으로 실현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관점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살펴보든 간에 전근재 조선의 모습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림으로써 갑오경장이 나오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뒷날 항일 무장 투쟁의 기반이 되었다.
※참고문헌
1. 한국철학 에세이 김교빈 지음 2008 동녘
2. 실록 동학 농민혁명사 신순철 이진영 지음 1998 서경문화사
3. 동학농민봉기 한우근 지음 2000 세종대왕 기념 사업회
  • 가격2,000
  • 페이지수15페이지
  • 등록일2014.05.26
  • 저작시기2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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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948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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