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두 얼굴 - 박정희와 장준하 인물분석(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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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시대의 두 얼굴 - 박정희와 장준하 인물분석(탐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시대의 두 얼굴
(박정희와 장준하)



‣ 들어가면서

‣ 시대적 상황과 흐름
① 국제 정세
② 국내 정세

‣ 박정희의 생애

‣ 대통령 박정희

‣ 장준하의 생애

‣ 장준하 그의 죽음에 대한 의문

‣ 엇갈린 그들의 삶

‣ 맺음말

‣ 논제

본문내용

하느냐!”라고 소리치자 박정희가 “죄송합니다.”를 일본어로 대답한 것에 놀랐다고 한다. 이에 장준하는 그가 일본군 출신이하는 것을 알고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에게 건의했으나 “우리에게 도움이 되면 그 뿐”이라고 일축하며 장준하의 의견을 무시했다. 이것이 장준하와 박정희의 처음이자 마지막 직접적인 만남이었다.
이후 세월이 흘러 516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장준하는 장면내각이 붕괴되어 민주화의 새 바람이 불 것이라 생각하고 군사 정변에 아무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의 잡지 ‘사상계’ 권두언을 통해 군사정변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글을 게재하기도 한다.
4 19혁명이 입헌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 혁명이었다면 5 16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는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 [1961. 6. <사상계> 권두언 中]
그러나 군사정변의 중심에 박정희가 있음을 알자 곧바로 군사정부에 반박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는 ‘군사정변을 일으킨 자의 얼굴이 예전에 일본어를 썼던 사람과 비슷하게 생겼으니 알아봐달라’ 라고 하였고, 박정희는 ‘누가 감히 내 뒷조사를 하는가?’라고 화를 냈다고 한다. 또한 장준하는 “국민 모두가 대통령이 될 수 있어도 박정희만은 안 된다.”라고 말했다 이는 박정희가 독립군 토벌에 앞장선 일본군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만남은 이른바 ‘밀수왕초사건’이다. 이 사건은 1966년 삼성재벌이 일본에서 사카린을 밀수해오다가 적발되었는데, 이를 장준하가 대구연설에서 “밀수 왕초는 바로 박정희라는 사람입니다.”라고 비판했다. 이로 인해 그는 대통령 명예 훼손죄로 구속되었다.
세 번째 만남은 74남북 공동성명이 발표된 1972년이다. 1970년대는 데탕트시대였다. 이러한 세계화 정세에 맞추어 1972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7월 4일 북한과의 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한반도에는 평화의 기운이 감돌았다. 이 소식을 접한 장준하는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중략).....모든 진리 모든 도덕 모든 선이 통일과 대립하는 것일 때에는 그것은 거짓 명분이지 진실이 아니다. [1972.9. <민족주의자의 길>-장준하]
이처럼 그는 남북공동성명으로 인해 평화 통일에 한 발짝 내딛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후 정부가 10월 유신체제를 발표하자 남북공동성명이 남한과 북한의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쇼였다고 하며 정부를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그는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100만인 서명 운동을 추진하며 적극적으로 저항하였다.
보다시피 세 번의 만남은 모두 두 인물의 첨예한 대립으로 끝을 맺는다.
맺음말
박정희와 장준하는 1960~70년대에 나타난 두 노선의 대표적인 인물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방법이 달랐을 뿐, 당시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쏟았다. 박정희는 군인 출신이었기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전쟁 이후 피폐해진 나라 경제를 구제하기 위해 힘썼고, 다른 한 사람은 전자에 비해 소극적인 방법이지만 지식인으로서 민주화를 위하여 펜으로 대항하며 의식적으로 깨어있는 인물이었다.
민중들은 4.19혁명 이후 민주주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장면을 중심으로 한 제 2공화국이 출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의 실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 2공화국에 불만을 품은 군부가 5.16군사혁명을 일으켰고 민중들도 이를 지지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상황이 정리된 후 군부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던 박정희를 비롯한 군부세력이 독재체제를 구충하면서 이는 ‘쿠테타’로 변질되었다.
적극적인 방법으로 시대를 변화 시키는 것은 그 시대 뿐 아니라 미래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적절한 시기에 절제하는 미덕이 필요하다. 박정희가 만약 적정한 선에서 대통령직을 그만 두고 민정으로 권력을 이양했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경제대통령으로 평가 받았을 것이다. 그는 적극적으로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 힘썼지만 절제를 몰랐던 탓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그가 선택했던 방법이 결코 옳고 정당한 방법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장준하는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을 위해 힘쓴 독립투사로, 해방 후에는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펜으로 정부에 저항하다가 정치권으로 뛰어들게 된다. 그가 돌연 정치권에 뛰어든 이유는 박정희와 달리 글로써 나라를 위해 민족의식을 개혁하려는 소극적인 개혁을 선택했으나 정부의 탄압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소극적 개혁의 한계를 느끼고 직접 정치권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우리나라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한 것 아닐까? 그러나 장준하 역시 정치가로서의 욕심이 없었다고 볼 수 없다. 국회의원 선거에 낙마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새로운 당을 만들어 출마한 것도 그렇고, 평소 ‘대통령이 되는 법’이라는 책을 즐겨 읽었으며 실제로 의문사 하기 전 박정희 정부를 뒤엎을만한 의거를 준비했다는 설 역시 그의 정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장준하는 국가와 국민을 먼저 생각할 줄 알았던 의식이 깨어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당연한 것 같다. 과연 재야의 대통령이란 칭호가 부족함이 없다.
논제
※ 박정희의 삶을 통해 바람직한 정치는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역사가 어떻게 기억되고 평가되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자
※ 장준하를 생각하며 그의 사상과 국가관을 살펴보고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교훈과 자세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 참고문헌 및 참고사이트 >
『박정희를 다시 생각한다』/하수정. 신라, 1997.
『가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 다카기 마사오, 박정희에게 만주국이란 무엇이었는가』/강상중. 책과함께, 2013
『돌베게』/장준하. 세계사. 2006.
『장준하 평전』/김삼웅. 시대의 창. 2009.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 : 장준하 의문사 사건 조사관의 대국민 보고서』/고상만. 돌베게, 2012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
EBS 지식채널e http://www.ebs.co.kr
장준하 기념사업회 http://www.peacewav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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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5.05.04
  • 저작시기20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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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966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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