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것이다. 이 중심에는 김일성 개인과 그의 이미지가 자리 잡고 있다. 김일성은 1945년 조선으로 돌아온 지 3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음악, 시, 영화, 그의 이름을 딴 대학교가 생기는 등 “개인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김일성에 대한 상징화와 우상화 속에서 민족주체성은 하나의 계급, 하나의 정당을 거쳐 한 사람으로 집중되었다. “개인숭배”라는 북한의 특이한 전환과정을 통해 김일성은 지난 시절 조선에서 권위를 상징하는 것들을 체화하고 독점하면서 아버지이자 마을 원로이면서 성직자가 된 것이다.
김일성의 만주 경험은 국가를 잃고, 투쟁하고, 결국 되찾는 대서사시가 되었으며 민족독립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1948년 김일성 개인의 전면적 성인화가 시작되던 시기에 이르러 다른 모든 빨치산의 활동은 가려졌다. 북한의 정치권력은 김일성과 그의 측근들이 차지했고, 북한정치의 형성에 만주 경험이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혁명
4년간의 정치적 강화, 사회개혁, 경제재건 및 이데올로기 구축과정을 거친 후 1949년 여름, 북한정권은 안정되고 견고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북한은 이승만 정권이 조국 분단을 영구화하고 38선에서의 무력충돌을 유발한다고 비난했다.
김일성은 군사적 방법으로 북한의 민주기지로부터 조국의 나머지 부분으로까지 혁명을 확장해야 할 때가 왔다고 확신했다. 그는 전쟁을 준비하는 동시에 한반도 통일을 위해 이승만을 반대하는 모든 ‘민주주의’ 세력들이 북한과 연합할 것을 요청하는 등 남한에 대해 평화공세를 펼쳤다. 1949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이 설립되었고 이는 이승만 ‘도당’과 미국을 몰아내고 단일 정부의 한반도 통일을 이룩하자는 목표를 표방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자유로운 정치 환경이 조성된다면 북한에서 80%, 남한에서 65~70%를 득표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만약 이승만과 미군이 이러한 그들의 계획을 반대한다면 이는 남한과 미국에 대해 “평화적 통일”을 가로막았다는 정치적 손실을 줄 것이었다. 이렇듯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통일 제안은 그들에게 기술적으로 이로운 것이었다.
조선인민군
북한정권은 1946년 말부터 병사를 모집했는데, 군 조직은 전직 일본군 및 경찰, 만주와 연안에서 중국내전에 참가했던 사람, 군 조직으로 이첩된 현직 경찰 등 이전에 군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 구성되었다. 군은 김일성의 절친한 만주유격대 동료들인 최용건, 김책, 김일, 강건 등이 장악하였다. 조선인민군은 1948년 2월 창건되었다.
소련고문관들은 북한점령 초기부터 조선인들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사용법을 훈련시켰다. 1948년 중반에는 탱크, 비행기 및 중장비들이 북한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여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이러한 지원이 계속되었다. 또한, 일본군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남한군을 주도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북한군에서는 1948년 6월에 일본군에 종사한 경력이 있는 모든 간부의 숙청작업이 끝났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중국혁명에 같이 참가했었기 때문에 중국공산군의 북한군에 대한 영향은 보다 친밀하고 사적이었다. 한국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조선인민군의 절반 이상은 중국 국공내전에 참가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아마 10만 명 정도의 북한군이 1947~49년 중국 내전기간동안 중국 동북지역에 파견되어 중국공산주의자들을 도운 것으로 추정되는데, 1950년 말 미국에 대항하여 북한을 지키기 위해 중국이 개입한 것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도움에 대한 답례였다.
전쟁을 향하여
북한지도부가 어떤 생각으로 남침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는데, 이러한 문서들이 없는 것은 전쟁 계획이 광범위하게 회람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김일성의 남침은 자신의 민족주의적 비전이 그 동기였으며, 상황이 아직 자신들에게 유리한 시점에서 북조선 혁명을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 완성하는 일이기도 했다.
소련에게 있어 북한에 의한 한반도 통일은 한반도에 자신들의 안보지대를 구축함으로써 아시아 본토로부터 미국과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
북조선 혁명이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식이 아닌 조선인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한 북한식의 수용이었으며 토착화를 통해 북조선만의 사회를 건설했다고 보는 저자의 관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북조선 혁명이 북조선의 ‘소비에트화’가 아닌, 소비에트 체제의 ‘조선화’라는 저자의 언급은 이를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모두가 붕괴할 것이라 예상하지만 여전히 건재한 북한을 이해하는 데 다양한 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북한의 국가 수립 이전부터 이후 체제 수립 과정을 기술하는 방법적 측면에서 북한의 자연적 환경과 식민 경험, 기독교 등 외래문화의 정착 과정과 뿌리 깊은 유교문화의 전통 등 북한만이 가진 조건을 하나씩 검토한 것은 매우 중요한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이해되지 않는 내용, 의문점
김일성 개인숭배의 원천은 일본 천황제의 잔재와 초기 기독교 유산과 함께, 유교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나타났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는데 이는 다소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력한 공동체 사회로 빠르게 응집해간 사실과 여성과 지식인 등에 대한 당과 대중의 태도 등 여러면에서 ‘유교적 전통’을 대입하는 것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일성과 그 가족들에 대한 과잉 숭배와 부자 세습의 정통성 확보가 그저 조선인들이 유교 관습에 익숙해 가능했다는 분석은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다.
내용에 대한 평가
스칼라피노 -이정식 교수의 글에서는 해방 후 북한과 남한이 미국과 중국,소련 등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힘의 논리에의해 두 가지 체제로 분리되어가는 과정을 기술하였다. 뿐만아니라 사회주의에 기반한 국가 성립 자체가 국가 실패로 이어지는 예정된 느낌이 강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북한의 사회주의가 \'현재 왜 실패했나‘를 반추해보기 보다 북한의 혁명으뉴 ’당시 얼마나 성공적인 시도였을까‘에 주목하게 된다.
특히 미국의 노획문서와 소련 문헌들 , 북한과 국내 학자들이 연구 결과까지 두루 인용한 것은 주목할 만한다. 북한 사회의 변화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다양한 자료의 활용은 저자의 주장에 신뢰감을 실어주었다.
김일성의 만주 경험은 국가를 잃고, 투쟁하고, 결국 되찾는 대서사시가 되었으며 민족독립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1948년 김일성 개인의 전면적 성인화가 시작되던 시기에 이르러 다른 모든 빨치산의 활동은 가려졌다. 북한의 정치권력은 김일성과 그의 측근들이 차지했고, 북한정치의 형성에 만주 경험이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혁명
4년간의 정치적 강화, 사회개혁, 경제재건 및 이데올로기 구축과정을 거친 후 1949년 여름, 북한정권은 안정되고 견고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북한은 이승만 정권이 조국 분단을 영구화하고 38선에서의 무력충돌을 유발한다고 비난했다.
김일성은 군사적 방법으로 북한의 민주기지로부터 조국의 나머지 부분으로까지 혁명을 확장해야 할 때가 왔다고 확신했다. 그는 전쟁을 준비하는 동시에 한반도 통일을 위해 이승만을 반대하는 모든 ‘민주주의’ 세력들이 북한과 연합할 것을 요청하는 등 남한에 대해 평화공세를 펼쳤다. 1949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이 설립되었고 이는 이승만 ‘도당’과 미국을 몰아내고 단일 정부의 한반도 통일을 이룩하자는 목표를 표방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자유로운 정치 환경이 조성된다면 북한에서 80%, 남한에서 65~70%를 득표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만약 이승만과 미군이 이러한 그들의 계획을 반대한다면 이는 남한과 미국에 대해 “평화적 통일”을 가로막았다는 정치적 손실을 줄 것이었다. 이렇듯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통일 제안은 그들에게 기술적으로 이로운 것이었다.
조선인민군
북한정권은 1946년 말부터 병사를 모집했는데, 군 조직은 전직 일본군 및 경찰, 만주와 연안에서 중국내전에 참가했던 사람, 군 조직으로 이첩된 현직 경찰 등 이전에 군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 구성되었다. 군은 김일성의 절친한 만주유격대 동료들인 최용건, 김책, 김일, 강건 등이 장악하였다. 조선인민군은 1948년 2월 창건되었다.
소련고문관들은 북한점령 초기부터 조선인들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사용법을 훈련시켰다. 1948년 중반에는 탱크, 비행기 및 중장비들이 북한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여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이러한 지원이 계속되었다. 또한, 일본군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남한군을 주도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북한군에서는 1948년 6월에 일본군에 종사한 경력이 있는 모든 간부의 숙청작업이 끝났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중국혁명에 같이 참가했었기 때문에 중국공산군의 북한군에 대한 영향은 보다 친밀하고 사적이었다. 한국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조선인민군의 절반 이상은 중국 국공내전에 참가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아마 10만 명 정도의 북한군이 1947~49년 중국 내전기간동안 중국 동북지역에 파견되어 중국공산주의자들을 도운 것으로 추정되는데, 1950년 말 미국에 대항하여 북한을 지키기 위해 중국이 개입한 것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도움에 대한 답례였다.
전쟁을 향하여
북한지도부가 어떤 생각으로 남침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는데, 이러한 문서들이 없는 것은 전쟁 계획이 광범위하게 회람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김일성의 남침은 자신의 민족주의적 비전이 그 동기였으며, 상황이 아직 자신들에게 유리한 시점에서 북조선 혁명을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 완성하는 일이기도 했다.
소련에게 있어 북한에 의한 한반도 통일은 한반도에 자신들의 안보지대를 구축함으로써 아시아 본토로부터 미국과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
북조선 혁명이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식이 아닌 조선인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한 북한식의 수용이었으며 토착화를 통해 북조선만의 사회를 건설했다고 보는 저자의 관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북조선 혁명이 북조선의 ‘소비에트화’가 아닌, 소비에트 체제의 ‘조선화’라는 저자의 언급은 이를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모두가 붕괴할 것이라 예상하지만 여전히 건재한 북한을 이해하는 데 다양한 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북한의 국가 수립 이전부터 이후 체제 수립 과정을 기술하는 방법적 측면에서 북한의 자연적 환경과 식민 경험, 기독교 등 외래문화의 정착 과정과 뿌리 깊은 유교문화의 전통 등 북한만이 가진 조건을 하나씩 검토한 것은 매우 중요한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이해되지 않는 내용, 의문점
김일성 개인숭배의 원천은 일본 천황제의 잔재와 초기 기독교 유산과 함께, 유교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나타났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는데 이는 다소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력한 공동체 사회로 빠르게 응집해간 사실과 여성과 지식인 등에 대한 당과 대중의 태도 등 여러면에서 ‘유교적 전통’을 대입하는 것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일성과 그 가족들에 대한 과잉 숭배와 부자 세습의 정통성 확보가 그저 조선인들이 유교 관습에 익숙해 가능했다는 분석은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다.
내용에 대한 평가
스칼라피노 -이정식 교수의 글에서는 해방 후 북한과 남한이 미국과 중국,소련 등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힘의 논리에의해 두 가지 체제로 분리되어가는 과정을 기술하였다. 뿐만아니라 사회주의에 기반한 국가 성립 자체가 국가 실패로 이어지는 예정된 느낌이 강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북한의 사회주의가 \'현재 왜 실패했나‘를 반추해보기 보다 북한의 혁명으뉴 ’당시 얼마나 성공적인 시도였을까‘에 주목하게 된다.
특히 미국의 노획문서와 소련 문헌들 , 북한과 국내 학자들이 연구 결과까지 두루 인용한 것은 주목할 만한다. 북한 사회의 변화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다양한 자료의 활용은 저자의 주장에 신뢰감을 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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