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구산선문
Ⅲ. 구산선문의 종류
1. 가지산파(迦智山派)
① 개창자 : 도의국사(道義國師) ② 성립과 발전
2. 실상사파(實相山派)
① 개창자 : 홍척 (洪陟) ② 성립과 발전
3. 희양산파(曦陽山派)
① 개창자 : 지증 (智證) ② 성립과 발전
4. 동리산파(桐裏山派)
① 개창자 : 혜철(惠哲) ② 성립과 발전
5. 봉림산파(鳳林山派)
① 개창자 : 현욱(玄昱) ② 성립과 발전
6. 성주산파(聖住山派)
① 개창자: 무염(無染) ② 성립과 발전
7. 사굴산파( 掘山派)
① 개창자: 범일(梵日) ② 성립과 발전
8. 사자산파(獅子山派)
① 개창자 : 도윤(道允) ② 성립과 발전
9. 수미산파(須彌山派)
① 개창자: 이엄(利嚴) ② 성립과 발전
Ⅳ. 결론
Ⅱ. 구산선문
Ⅲ. 구산선문의 종류
1. 가지산파(迦智山派)
① 개창자 : 도의국사(道義國師) ② 성립과 발전
2. 실상사파(實相山派)
① 개창자 : 홍척 (洪陟) ② 성립과 발전
3. 희양산파(曦陽山派)
① 개창자 : 지증 (智證) ② 성립과 발전
4. 동리산파(桐裏山派)
① 개창자 : 혜철(惠哲) ② 성립과 발전
5. 봉림산파(鳳林山派)
① 개창자 : 현욱(玄昱) ② 성립과 발전
6. 성주산파(聖住山派)
① 개창자: 무염(無染) ② 성립과 발전
7. 사굴산파( 掘山派)
① 개창자: 범일(梵日) ② 성립과 발전
8. 사자산파(獅子山派)
① 개창자 : 도윤(道允) ② 성립과 발전
9. 수미산파(須彌山派)
① 개창자: 이엄(利嚴) ② 성립과 발전
Ⅳ. 결론
본문내용
개창자: 범일(梵日)
성은 김(金). 시호 통효(通曉). 품일(品日)이라고도 한다. 15세에 출가하여 829년(흥덕왕 4) 경주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김의종(金義宗)을 따라 당(唐)나라에 가 제안(濟安)에게 6년간 사사하였다.
844년(문성왕 6년) 탄압으로 승려를 도태하고 절을 파괴하는 법난(法難)을 만나 상산(商山)에 피신, 선정(禪定)하다가 847년(문성왕 9) 귀국, 백달산(白達山)에서 좌선하고 굴산사(山寺)에서 40년을 보내면서 경문(景文)·헌강(憲康)·정강(定康)의 3왕으로부터 왕사(王師)나 국사(國師)가 되어 주기를 권유받았으나 응하지 않고 수도와 불경연구에만 전념하였다.
② 성립과 발달
수선사를 결성하여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사(松廣寺)에서 선종을 다시 일으킨 지눌(知訥)을 배출하여, 가지산문(迦智山門)과 함께 고려 중엽에 구산선문의 맥을 이었으며, 제자로 개청(開淸)과 행적(行寂)이 있다. 충청남도 대덕군 백달산에서 수행한 범일은 명주도독 김공의 요청으로 굴산사에서 머물다 입적하였다. 행적은 경북 봉화군 태자사에 자리하고, 손자 격인 순백의 음기(陰記)에 의해 제자의 이력이 자세하게 남아 있다.
개청은 명주 성산 지장선원에 자리하고 있다. 행적은 김해 지방의 가야계 김씨 세력인 소충자(蘇忠子)와 소율희(蘇律熙) 형제의 후원을 받고, 신덕왕의 요청으로 남산 실제사에 머문다. 개청은 알찬(閼飡) 민규(閔規)와 왕순식(王順式)의 후원을 받고, 뒤이어 왕건과 인연을 맺는다.
이러한 사실로서, 김해와 마찬가지로 신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명주 지역은, 태조 왕건의 고려 건국 이후 친고려정책으로 전환한 신라왕실에 같이 발맞추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위로는 명주에서 아래로는 김해에 이르기까지, 후삼국기 한반도의 동부지역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신라의 영향권 속에 들어 있었다고 하겠다.
8. 사자산파(獅子山派)
① 개창자 : 도윤(道允)
속성 박(朴). 호 쌍봉(雙峰). 시호 철감선사(徹鑒禪師). 탑호(塔號) 징소(澄昭). 한주(漢州:경기 廣州) 출생. 18세에 출가하여 귀신사(歸信寺)에서 《화엄경(華嚴經)》을 배웠으며, 825년(헌덕왕 17) 중국 당(唐)나라에 가서 보원(普願)에게서 심인(心印)을 배우고 그 법을 이었다. 847년(문성왕 9) 범일(梵日)과 함께 귀국하여 금강산에 머물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때 경문왕도 귀의(歸衣)시켰다고 전한다.
② 성립과 발전
사자산파의 창시자 도윤의 제자중 제자에 절중(折中)이 있는데, 그는 19세 때 장곡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 당시 도윤은 금강산에 있었는데 그것으로 참배하여 스승으로 부터 인가를 얻었다. 882년 금통의 위공의 진언에 따라 공산사에 머문 적이 있고, 사자산 선사 석운의 청으로 흥녕선원에 머무르게 되면서, 헌강왕과 정강왕의 귀의를 받았다. 사자산문으로 크게 발족되는 것은 이때부터였다. 절중의 제자에 경유, 여정 등이 있다. 사자산파의 개창자 도윤은 입적한 후에 철감이라 시호하였고, 탑명을 징소탑이라고 하였다.
9. 수미산파(須彌山派)
① 개창자: 이엄(利嚴)
속성 김(金). 시호 진철(眞徹). 탑호 보월승공(寶月乘空). 계림(鷄林:경주) 출생. 12세 때 가야산(伽倻山) 갑사(岬寺)의 덕량(德良)을 따라 출가하고, 886년(정강왕 1) 도견(道堅)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896년(진성여왕 10) 당(唐)나라의 도응(道膺)에게서 선종(禪宗)의 진리를 배우고 911년(효공왕 15) 귀국하여 김해(金海) 승광산(僧光山)에 절을 짓고 4년 동안 선종을 전파하였다.
고려 태조의 소명을 받고 개경(開京)에 들어가 우대를 받다가 932년 태조가 해주(海州) 수미산(須彌山)에 창건한 광조사(廣照寺) 주지가 되어 선풍(禪風)을 선양, 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를 비롯한 선문구산(禪門九山)이 완성되었다. 광조사(廣照寺)에 937년(태조 20)에 최언위(崔彦)가 세운 비가 있다.
② 성립과 발전
9산문 중 가장 늦게 성립된 수미산문의 개창자는 이엄이다. 이엄의 재가(在家) 제자로 황보제공과 왕유, 이척량 등 전직과 현직 고관이 있었다. 그와 더불어 여엄, 경유, 형미 등 4인은 모두 운거의 법을 받아와 왕건과 연결되고 있어서, 당시에 이들을 4무외사라고 하였다. 형미는 891년 입당하여 905년에 귀국하였는데 무위갑사에서 교화활동을 벌인 사람이다 경유는 형미와 같은 해에 입당했으나 908년 귀국하였고, 곧 고려 태조 왕건의 왕사가 된바 있다. 여엄은 909년 귀국하였는데 태조의 배려로 양평 보리사에서 주석하였다. 이들의 사상 경향은 대체로 당시 고려의 왕정을 보익하는 성격을 지녔다. 그리하여 이엄은 "왕자는 사해를 집으로 삼고 만민을 자식으로 삼아 무고한 무리를 죽이지 말라."고 하였다 그의 제자에 처광과 도인 등이 있으나 모두 그 행적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Ⅳ. 결론
이제까지 구산선문이 무엇인가에 괸한 문제와 각각의 종파에 대해 알아보았다.
먼저 구산선문이라는 것은 선종이 이땅에 확고히 자리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교종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며 한국불교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다음으로 살펴본 것은 구산선문 각각의 개창자의 소개와 선문의 성립과 발전과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구산선문은 도의의 가지산문, 지증의 희양산문, 홍척의 실상산문, 혜철의 동리산문, 도윤의 사자산문, 낭혜의 성주산문, 범일의 사굴산문, 현욱의 봉림산문, 이엄의 수미산문을 말한다.
이러한 구산선문의 시작은 중국을 통해 이루어졌으나 신라만의 독특할 색깔을 첨가하여 각 종파간의 뚜렷한 특성을 갖고 사상을 발전시켜 나감으로해서 시대 사상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다.
▣ 참고문헌
-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 불교교재편찬 위원회, 『불교사상의 이해』, 불교시대사, 1999
- 곽철환, 『불교 길라잡이』, 시공사, 1998
- 한길로 編著, 『불교입문』, 보련각, 1979.
- 마쓰야 후미오 著 이 원섭 譯,『불교개론』, 현암사, 1997
- 정병조,『한국 종교사상사1-불교 도교편』, 연세대학출판부, 1991
- 한기두, 한국 불교사상 연구』, 일지사, 1980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은 김(金). 시호 통효(通曉). 품일(品日)이라고도 한다. 15세에 출가하여 829년(흥덕왕 4) 경주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김의종(金義宗)을 따라 당(唐)나라에 가 제안(濟安)에게 6년간 사사하였다.
844년(문성왕 6년) 탄압으로 승려를 도태하고 절을 파괴하는 법난(法難)을 만나 상산(商山)에 피신, 선정(禪定)하다가 847년(문성왕 9) 귀국, 백달산(白達山)에서 좌선하고 굴산사(山寺)에서 40년을 보내면서 경문(景文)·헌강(憲康)·정강(定康)의 3왕으로부터 왕사(王師)나 국사(國師)가 되어 주기를 권유받았으나 응하지 않고 수도와 불경연구에만 전념하였다.
② 성립과 발달
수선사를 결성하여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사(松廣寺)에서 선종을 다시 일으킨 지눌(知訥)을 배출하여, 가지산문(迦智山門)과 함께 고려 중엽에 구산선문의 맥을 이었으며, 제자로 개청(開淸)과 행적(行寂)이 있다. 충청남도 대덕군 백달산에서 수행한 범일은 명주도독 김공의 요청으로 굴산사에서 머물다 입적하였다. 행적은 경북 봉화군 태자사에 자리하고, 손자 격인 순백의 음기(陰記)에 의해 제자의 이력이 자세하게 남아 있다.
개청은 명주 성산 지장선원에 자리하고 있다. 행적은 김해 지방의 가야계 김씨 세력인 소충자(蘇忠子)와 소율희(蘇律熙) 형제의 후원을 받고, 신덕왕의 요청으로 남산 실제사에 머문다. 개청은 알찬(閼飡) 민규(閔規)와 왕순식(王順式)의 후원을 받고, 뒤이어 왕건과 인연을 맺는다.
이러한 사실로서, 김해와 마찬가지로 신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명주 지역은, 태조 왕건의 고려 건국 이후 친고려정책으로 전환한 신라왕실에 같이 발맞추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위로는 명주에서 아래로는 김해에 이르기까지, 후삼국기 한반도의 동부지역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신라의 영향권 속에 들어 있었다고 하겠다.
8. 사자산파(獅子山派)
① 개창자 : 도윤(道允)
속성 박(朴). 호 쌍봉(雙峰). 시호 철감선사(徹鑒禪師). 탑호(塔號) 징소(澄昭). 한주(漢州:경기 廣州) 출생. 18세에 출가하여 귀신사(歸信寺)에서 《화엄경(華嚴經)》을 배웠으며, 825년(헌덕왕 17) 중국 당(唐)나라에 가서 보원(普願)에게서 심인(心印)을 배우고 그 법을 이었다. 847년(문성왕 9) 범일(梵日)과 함께 귀국하여 금강산에 머물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때 경문왕도 귀의(歸衣)시켰다고 전한다.
② 성립과 발전
사자산파의 창시자 도윤의 제자중 제자에 절중(折中)이 있는데, 그는 19세 때 장곡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 당시 도윤은 금강산에 있었는데 그것으로 참배하여 스승으로 부터 인가를 얻었다. 882년 금통의 위공의 진언에 따라 공산사에 머문 적이 있고, 사자산 선사 석운의 청으로 흥녕선원에 머무르게 되면서, 헌강왕과 정강왕의 귀의를 받았다. 사자산문으로 크게 발족되는 것은 이때부터였다. 절중의 제자에 경유, 여정 등이 있다. 사자산파의 개창자 도윤은 입적한 후에 철감이라 시호하였고, 탑명을 징소탑이라고 하였다.
9. 수미산파(須彌山派)
① 개창자: 이엄(利嚴)
속성 김(金). 시호 진철(眞徹). 탑호 보월승공(寶月乘空). 계림(鷄林:경주) 출생. 12세 때 가야산(伽倻山) 갑사(岬寺)의 덕량(德良)을 따라 출가하고, 886년(정강왕 1) 도견(道堅)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896년(진성여왕 10) 당(唐)나라의 도응(道膺)에게서 선종(禪宗)의 진리를 배우고 911년(효공왕 15) 귀국하여 김해(金海) 승광산(僧光山)에 절을 짓고 4년 동안 선종을 전파하였다.
고려 태조의 소명을 받고 개경(開京)에 들어가 우대를 받다가 932년 태조가 해주(海州) 수미산(須彌山)에 창건한 광조사(廣照寺) 주지가 되어 선풍(禪風)을 선양, 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를 비롯한 선문구산(禪門九山)이 완성되었다. 광조사(廣照寺)에 937년(태조 20)에 최언위(崔彦)가 세운 비가 있다.
② 성립과 발전
9산문 중 가장 늦게 성립된 수미산문의 개창자는 이엄이다. 이엄의 재가(在家) 제자로 황보제공과 왕유, 이척량 등 전직과 현직 고관이 있었다. 그와 더불어 여엄, 경유, 형미 등 4인은 모두 운거의 법을 받아와 왕건과 연결되고 있어서, 당시에 이들을 4무외사라고 하였다. 형미는 891년 입당하여 905년에 귀국하였는데 무위갑사에서 교화활동을 벌인 사람이다 경유는 형미와 같은 해에 입당했으나 908년 귀국하였고, 곧 고려 태조 왕건의 왕사가 된바 있다. 여엄은 909년 귀국하였는데 태조의 배려로 양평 보리사에서 주석하였다. 이들의 사상 경향은 대체로 당시 고려의 왕정을 보익하는 성격을 지녔다. 그리하여 이엄은 "왕자는 사해를 집으로 삼고 만민을 자식으로 삼아 무고한 무리를 죽이지 말라."고 하였다 그의 제자에 처광과 도인 등이 있으나 모두 그 행적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Ⅳ. 결론
이제까지 구산선문이 무엇인가에 괸한 문제와 각각의 종파에 대해 알아보았다.
먼저 구산선문이라는 것은 선종이 이땅에 확고히 자리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교종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며 한국불교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다음으로 살펴본 것은 구산선문 각각의 개창자의 소개와 선문의 성립과 발전과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구산선문은 도의의 가지산문, 지증의 희양산문, 홍척의 실상산문, 혜철의 동리산문, 도윤의 사자산문, 낭혜의 성주산문, 범일의 사굴산문, 현욱의 봉림산문, 이엄의 수미산문을 말한다.
이러한 구산선문의 시작은 중국을 통해 이루어졌으나 신라만의 독특할 색깔을 첨가하여 각 종파간의 뚜렷한 특성을 갖고 사상을 발전시켜 나감으로해서 시대 사상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다.
▣ 참고문헌
-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 불교교재편찬 위원회, 『불교사상의 이해』, 불교시대사, 1999
- 곽철환, 『불교 길라잡이』, 시공사, 1998
- 한길로 編著, 『불교입문』, 보련각, 1979.
- 마쓰야 후미오 著 이 원섭 譯,『불교개론』, 현암사, 1997
- 정병조,『한국 종교사상사1-불교 도교편』, 연세대학출판부, 1991
- 한기두, 한국 불교사상 연구』, 일지사, 1980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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