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리더십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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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다윗의 리더십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제 1장 서론

제 2장 등극 이전 왕권 획득을 위한 기반들

제 3장 등극 후 중앙집권화를 위한 정책들

제 4장 과도한 중앙집권화 정책의 후유증들(리더십 실패)

제 5장 결론

본문내용

다. 그 후 얼마 되어 압살롬은 왕위를 차지할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압살롬의 반란을 지원했던 사람들은 누구였고 그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먼저 압살롬이 민중들을 규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윗의 통치가 억울한 사람들과 불만을 품은 사람들 삼하 15:1-6
의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고, 따라서 압살롬은 그러한 민심을 이용해 사람들을 규합함으로써 자신의 반란에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압살롬의 모습은 그가 마키아벨리즘적 성격을 지닌 리더로 추측해볼 수 있게 하여준다. 수단보다는 목적이 중요하고 자신이 얻는 것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심리를 움직이고 조작하는 특성을 가진 리더로 말이다.
또 한편으로는 압살롬이 각 지파의 지도자들을 자가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의 통치의 특징 때문이었다. 즉 그들이 보기에 다윗은 여부스족속의 왕으로 보이기 쉬웠으며 처음부터 다윗은 지파들의 지지로 일어선 사람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따라서 각 지파의 지도자들은 다윗이 처음 왕위에 오를 때 가졌던 기대와는 달리 점점 더 정치권에서 밀려나게 되었고 그들이 누리던 특권을 상실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압살롬의 반란에 대한 다윗의 대응은 두 가지의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무력을 통한 진압이었고 다른 하나는 회유를 통한 지지기반의 확보였다. 무력을 통한 진압은 요압이 이끄는 용병들로 구성된 다윗의 군대를 통해 이루어졌다. 반란이 진압된 이후, 북 이스라엘의 지파들은 다윗을 왕위로 복위케 하려는 의도로 다윗과 협상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다윗은 이러한 협상들이 진행 중인 가운데, 아비아달과 사독을 통해 유다의 장로들과 접촉하고 그들에게 “왕을 도로 모셔오는 일에 나중이 되지 말라”고 언질을 주면서 “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다. 삼하 19:13
”라고 이야기 하여 다윗이 그들을 북 이스라엘 보다 더 선호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다윗의 이러한 행위는 세바의 반란으로 이어진다.
제2절 과도한 지파 병합의 후유증 : 세바의 반란
압살롬의 반란이 진압 된 후 다윗이 미처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도 전에 새로운 반란이 터진다. 이 는 압살롬에 대한 승리로 다윗에 대한 저항이 모두 제거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실이다. 결국 다윗은 압살롭의 반란을 통해 유다와 지파들을 지지기반으로 삼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북 이스라엘을 통합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만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전통은 솔로몬까지 이어져 솔로몬은 눈에 띄게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차별하였고 결국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은 두개의 국가로 다시 나뉘게 된다. 결국 통합된 다윗 왕국은 다윗의 조직적인 통치 제도와 군사제도에 의해서 이루어진, 표면상의 통합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다윗은 리더개인적 차원에서는 리더직위에서 탈락을 하고 충성된 자신의 군사들을 상실하였으며 심리적 좌절을 겪게 되며 집단의 차원에서는 구성원들의 이탈이나 리더에게 기대했던 만족의 저하, 신뢰의 철회와 같은 행태로 이어 지게 되었다.
특성이론을 통한 리더십실패의 특성적 부분은 4장1절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압살롬이라는 Follower와의 커뮤니케이션의 부재, 인간적 배려의 취약 신유근, 1996 / 백기복 등, 1998
의 문제이다. 아들이 자기 이복누이를 겁탈해도 혼자서 화만 씩씩 냈지 어떤 적절한 훈계도 하지 못하는 당당하지 못한 다윗의 모습은 만 이 2년간 적절한 조치가 내려지기를 바랬던 압살롬을 살인자로 만든다. 만약 여기서 적절한 의사소통과 인간적인 배려나 관심이 교환되었다면 압살롬이 과연 자신의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까지 일으키는 상황을 만들었겠나 싶다.
상황적 리더십이론은 리더의 실패를 리더가 주어진 상황에 맞는 리더십 스타일을 발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데 리더의 주변에 존재하는 많은 상황변수에 맞게 리더십을 발휘하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은 것이지만 어렵다고 해서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현실세계에서의 이러한 적응의 실패는 냉혹한 결과를 가져다 준다. 그리고 다윗은 이러한 적응에도 실패하였다. 자신을 믿고 따르던 구성원에 대한 배려를 등한시 Yukl(1994)의 특성분류
하고 여러 민족국가들의 통일위해 이루어 낸 자신의 왕국을 유지시켜나가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의 부재는 다윗을 상황에 둔감한 리더로 만들고 다윗의 Follower들을 이탈 시켰다.
제 5장 결론
다윗의 왕국은 사울의 정치체제를 감안해 볼 때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국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윗은 이렇게 역사가 짧은 왕국을 팔레스타인 전역을 지배하는 이스라엘 역사상 전무후무한 왕국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다윗은 자신의 비대해진 왕국을 성공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정책을 추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윗을 크게 두 가지를 역점으로 두고 자신의 정책을 세워나갔다. 첫째는, 자신의 왕국이 다른 구변 국가들을 포함하는 다국적 왕국의 성격을 띠게 되자, 이 왕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새롭고 강격한 통치제도 정립에 주력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이러한 여러 정책 가운데에서 왕이 그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다윗의 정책은 정치, 군사, 종교의 세 방면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 정치 군사적인 정책이 제도와 군사적 힘을 통한 외적통합이었다면, 종교정책은 각 민족들의 신앙과 사상을 하나로 통합시키고자 하는 노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로써 다윗은 정치, 군사, 종교의 모든 영역을 왕인 자신에게로 집중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왕국은 전통적인 이스라엘의 통치제도와 종교제도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그의 왕국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안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였지만 그 내면에는 많은 갈등들이 억제되어 있었다. 그 갈등은 압살롬의 반란과 세바의 반란으로 이어지고 결국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의 분열을 촉진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결국 그의 왕국의 형태는 지지기반 세력은 없고 피지배자만 있는 형태가 되고 말았다. 다만 이러한 리더십실패의 상황 속에서도 다행스러운 것은 솔로몬이라는 유능한 후계자를 지목하였다는 점인데 그렇지만 다윗이라는 리더는 앞에서 열거된 여러 개인적·상황적 결점으로 인해 다윗의 통일왕국을 단명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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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2.01
  • 저작시기2005.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23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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