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건국과 호족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1. 고려의 건국과 호족
1) 호족세력의 동향
(1)호족의 개념과 성격
(2) 신라 말기 호족의 동향
2) 왕건의 즉위와 후삼국의 통일
(1) 궁예의 몰락과 왕건의 즉위
(2) 왕건 즉위 초 호족의 동향
(3)후삼국의 통일
3)태조의 여러시책
(1)대내정책
(2)대외정책
4)태조의 정치이념과 사상
(1) 고구려 계승이념
(2) 불교사상
(3) 풍수지리사상
(4) 유교사상

본문내용

터 지금까지 고려라는 국호를 고구려와 같은 것으로 여기어 고구려도 흔히 고려로 혼용해 왔고 고려왕조와 고구려가 그대로 연결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서도 고구려를 고려라 표기하고 또 궁예가 새운 태봉을 후고려라 하여 당시 우리도 고구려와 고려를 구별없이 썼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고려인은 자기네와 고구려를 연결된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왕건이 즉위 후 국호를 고려라 했다는 것은 바로 고구려를 칭했다는 얘기와 마찬가지가 된다.
태조는 서경(평양) 개척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데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평양이 한갓 이념상의 도읍이 아니라 현실적인 국도로 삼기 위한 준비로서, 또 평양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진출하여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다. 한편으로 고구려 계승이념 및 북진정책 등과 결합시켜 태조는 발해의 유민을 받아 들이고 후대하였다. -발해의 지배계층은 대부분 고구려인이었음-또한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 대해 격렬한 증오감을 나타내어 거란이 보낸 사신은 귀양보내고 보내온 낙타 50필은 만부교 아래 모두 굶겨죽여 끝내 국교를 단절하였다.
(2) 불교사상
신라 하대에 지방 호족의 등장과 함께 불교계에서는 선종이 점차 유행하였다. 진성여왕 이후부터는 선종의 각 종파가 지방의 호족세력과 각기 결합되어 갔고 후삼국 성립 이후에는 교종의 승려들도 지방세력과 연결되어 갔다.
태조가 후삼국을 하나로 끌어들이면서 쓴 회유책이 불교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태조는 개태사를 창건하여 후백제인들을 교화하고 민심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당시 개태사는 막대한 토지를 가졌으며 지사에 사를 두어 경영하였다. 이럴 경우 왕건은 한 승려와 결합함으로써 그와 사회경제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된 다른 사원세력간의 결연이 용이하였다. 실제 왕건과 연결된 승려들의 많은 결연사원이 대체로 그와 연결되어 있었다. 왕건은 더 많은 호족세력과 유대관계를 맺고 그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세력확대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태조는 건국 이전부터 각 지여그이 승려들과 교우관계를 맺어 승려들과 연결된 각 지방의 호족세력들과의 유대관계를 공고히 하면서 세력 확장을 도모하였고, 고려 건국 이후에도 호족 포섭책의 일환으로 승려들과의 결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으며 또한 복속된 지역의 백성들을 이들 승려들로 하여금 불법을 통해 교화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불교를 장려하고 육성시켜 나갔다. 또한 태조는 개경에 많은 사원을 건축하였다. 특히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팔관회와 연등회를 통해 불교의식과 의례를 문무관료와 백성이 다 함께 참여하는 국가적인 행사로 승화시키는 한편, 고승 대덕을 국사 왕사로 맞아 예를 표하고 통일정책을 추진함에 있어 많은 자문과 도움을 받았다.또 불교를 호국신앙으로서 국가를 보위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며 나아가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크게 기여시키고자 하였다.
(3) 풍수지리사상
나말려초의 사회적 전환기에 불교, 유교 사상과 함께 풍수지리사상이 널리 전파되었다. 이 시기 각 지역에서 독자적인 기반을 구축하고 세력확장을 도모하던 지방의 호족들은 자신들의 본거지를 명당으로 내세워 기존의 경주 중심의 고정적인 지역관념을 깨고 나말려초의 분열상을 합리화하고 호족 자신들의 독립적인 세력형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풍수지리사상을 수용하였다. 당시 풍수지리의 대가인 도선은 신라사회의 해체를 눈앞에 바라보면서, 시대적 모순을 자각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의지속에 당시의 자연환경을 유기적으로 파악하는 인문지리적인 지식과 경주 중앙귀족들의 부패와 무능, 각 지방에서의 호족들의 대두, 그리고 안정을 바라는 백성들의 염원 등에 대한 사회적 인식 태도를 종합하여 풍수지리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엿다. 이러한 풍수지리사상은 결과적으로 역사의 무대를 경주에서 중부지방인 송악으로 옮기게 하였고, 시대의 주역들을 경주의 진골귀족에서 지방의 호족으로 바뀌게 하여, 송악을 세력근거지로 한 왕건에게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유리한 입장이 되게 하였다. 특히 이 풍수지리사상은 인문지리적인 인식이 기존의 질서에 대한 혁명적인 선종과 연결되고 예언적인 도참설과 결부되어 사회적 전환의 추진력이 되었다.
따라서 왕건은 물론 각 지역의 호족들은 이러한 풍수지리사상을 통해 민심을 장악하고자 노력하였다. 신라의 붕괴와 고려의 건국, 고려의 삼국통일의 당위성을 부여함으로써 태조 왕건이 민심을 얻고 호족들을 포섭하여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기여하였고, 나아가 국가이념인 고구려의 계승이념을 정당화하고 불교 장려를 빙자해 초래될지도 모를 국가의 통치력과 경제력 약화를 방지하는데 기여한 태조의 지도이념 중 하나였다.
(4) 유교사상
신라 중대부터 왕권의 전제화 과정의 일환으로 유교의 정치이념이 수용되어져 부분적으로나마 정책에 반영되었고, 신라말기에 유교적 소양을 지닌 지식인들이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세력과 관계해 이들 호족의 독자적인 정치적 기반 구축에 일정한 정당성을 부여해 주고 있었다. 고려시대에 유교가 정치이념으로 구체화된 것은 성종 때 최승로의 <시무 28조>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지만 태조도 이미 유교적인 정치이념의 요체를 터득하고 있었다.
유교사상은 고려의 건국을 정당화하고 새로운 지배질서를 구축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태조의 통치이념 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유교가 태조의 통치이념의 하나였던 점은 원년(918)6월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천명을 내세워 궁예를 내몰고 왕건을 추대하자 태조가 이를 수용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태조 왕건은 즉위 후 유교적 정치사상의 핵심이랄 수 있는 <경천민애>를 실천에 옮겼다.
태조의 유교사상에 의한 인식과 태도는 <절요 10조>의 제 7조, 제 9조 및 제10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먼저 제 7조에서는 통치자가 민심을 얻고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가져야 될 정치 소양으로 유교의 기본적인 인식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으며, 제 9조에서는 국가통치의 공정함과 엄정성을 강조하였다. 한편 제 10조에서는 태조가 유교적인 교훈을 국가 통치의 기본철학으로 삼고 자신이 실천에 옮기고자 노력하였던 이들 사항들을 후대에 전하여 국가의 안정과 번영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 가격1,0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6.02.05
  • 저작시기2006.0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36234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