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문
본문
1. 원효의 일생
2. 원효의 사상
원효의 일화
1. 원효대사와 해골 물
2. 요석공주가 머물렀던 소요산
3. 자재암의 전설
4. 원효 불기(元曉不羈) 설화
참고문헌
본문
1. 원효의 일생
2. 원효의 사상
원효의 일화
1. 원효대사와 해골 물
2. 요석공주가 머물렀던 소요산
3. 자재암의 전설
4. 원효 불기(元曉不羈) 설화
참고문헌
본문내용
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나무의 열매가 보통과 달랐으므로 '사라밤' 이라 불렀다.
(2) 옛날 절을 주관한 이가 절의 종 한 사람에게 하룻저녁에 밤 두 개씩을 끼니로 주었더니, 종은 불만을 품고 관가에 송소하였다. 관가에서 그 밤을 가져다가 살펴보았더니, 한 개가 바리 하나에 가득 찼다. 그것을 보고 관리는 도리어 종 한 사람에게 한 개씩을 주도록 판결을 내렸다. 그 나무가 있는 골짜기를 율곡(栗谷)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3) 원효의 어머니가 일찍 유성(流星)이 품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원효를 잉태하였다. 해산할 때가 되자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다. 원효는 천성이 남달리 총명하여 스승 없이 학문을 깨쳤다.
(4) 어느 날 원효는 미친 듯이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주랴? 하늘 받칠 기둥감을 내 찍으련다.(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태종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 "대사께서 귀부인을 만나 어진 자식을 낳고 싶어 하신다. 나라에 어진 이가 있게 된다면 그보다 더 큰 유익이 없다."라고 말하고 궁리를 보내어 원효를 데려오게 하였다. 궁리가 원효를 찾으니 때마침 문천교를 지나고 있었다. 원효는 일부러 물 가운데 떨어져 옷을 적시니 요석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벗어 말리게 하였다. 원효가 요석궁에 머물러 묵게 된 뒤 공주는 잉태하여 설총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경서와 역사책을 널리 통달하였다. 그는 신라 십현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위의 기록과 같이 원효는 요석공주에게 자루 없는 도끼, 즉 옥문(玉門 : 陰門)을 빌려달라고 하여 하늘을 떠받칠 기둥, 즉 자신의 ‘물건’으로 설총을 잉태하게 했으며, 이렇게 파계한 다음인 문무왕 1년(661)에 후배 의상을 데리고 당나라 유학길을 떠났다가 대오 해탈했던 것이다.
(5) 원효는 파계하고 설총을 낳은 뒤로는 세속의 복장으로 갈아입고, 소성거사라 이름하였다. 광대가 춤추며 노는 큰 표주박을 우연히 얻어서 도구로 삼고 이름하여 '무애'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화엄경"의 게구에서 따온 이름이다. 원효는 무애를 가지고 '무애가'를 부르며 천촉만락을 노래하고 춤추면서 교화음영 하고 다녔으므로, 가난하고 몽매한 무리들까지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염불 한마디는 다 하게끔 되었으니, 원효가 끼친 교화는 참으로 컸다.
(6) 원효는 바다용의 권유에 따라 노상에서 조서를 받고 ≪금강삼매경소 金剛三昧經疏≫를 소의 두 뿔 위에 놓고 썼다. 이것을 ‘각승’이라고 불렀는데 본각과 시각, 두 가지 깨달음의 미묘한 뜻을 나타내고 있다.
(7) 원효가 입적하였을 때 아들 설총이 유해를 부수어 진용을 빚어 분황사에 안치하였다. 설총이 절을 하니 원효상이 문득 돌아보았다. 소상은 그 이후 돌아보는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한영우선생정년기념논총 간행위원회 (2003). 「원효-영원한 새벽」.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인물열전1』. 돌베개
김성룡 (2004). 「원효의 글쓰기와 중세적 주체」. 『한국문학사상사1』. 이회
원효학연구원 http://www.wonhyo.or.kr
(2) 옛날 절을 주관한 이가 절의 종 한 사람에게 하룻저녁에 밤 두 개씩을 끼니로 주었더니, 종은 불만을 품고 관가에 송소하였다. 관가에서 그 밤을 가져다가 살펴보았더니, 한 개가 바리 하나에 가득 찼다. 그것을 보고 관리는 도리어 종 한 사람에게 한 개씩을 주도록 판결을 내렸다. 그 나무가 있는 골짜기를 율곡(栗谷)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3) 원효의 어머니가 일찍 유성(流星)이 품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원효를 잉태하였다. 해산할 때가 되자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다. 원효는 천성이 남달리 총명하여 스승 없이 학문을 깨쳤다.
(4) 어느 날 원효는 미친 듯이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주랴? 하늘 받칠 기둥감을 내 찍으련다.(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태종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 "대사께서 귀부인을 만나 어진 자식을 낳고 싶어 하신다. 나라에 어진 이가 있게 된다면 그보다 더 큰 유익이 없다."라고 말하고 궁리를 보내어 원효를 데려오게 하였다. 궁리가 원효를 찾으니 때마침 문천교를 지나고 있었다. 원효는 일부러 물 가운데 떨어져 옷을 적시니 요석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벗어 말리게 하였다. 원효가 요석궁에 머물러 묵게 된 뒤 공주는 잉태하여 설총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경서와 역사책을 널리 통달하였다. 그는 신라 십현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위의 기록과 같이 원효는 요석공주에게 자루 없는 도끼, 즉 옥문(玉門 : 陰門)을 빌려달라고 하여 하늘을 떠받칠 기둥, 즉 자신의 ‘물건’으로 설총을 잉태하게 했으며, 이렇게 파계한 다음인 문무왕 1년(661)에 후배 의상을 데리고 당나라 유학길을 떠났다가 대오 해탈했던 것이다.
(5) 원효는 파계하고 설총을 낳은 뒤로는 세속의 복장으로 갈아입고, 소성거사라 이름하였다. 광대가 춤추며 노는 큰 표주박을 우연히 얻어서 도구로 삼고 이름하여 '무애'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화엄경"의 게구에서 따온 이름이다. 원효는 무애를 가지고 '무애가'를 부르며 천촉만락을 노래하고 춤추면서 교화음영 하고 다녔으므로, 가난하고 몽매한 무리들까지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염불 한마디는 다 하게끔 되었으니, 원효가 끼친 교화는 참으로 컸다.
(6) 원효는 바다용의 권유에 따라 노상에서 조서를 받고 ≪금강삼매경소 金剛三昧經疏≫를 소의 두 뿔 위에 놓고 썼다. 이것을 ‘각승’이라고 불렀는데 본각과 시각, 두 가지 깨달음의 미묘한 뜻을 나타내고 있다.
(7) 원효가 입적하였을 때 아들 설총이 유해를 부수어 진용을 빚어 분황사에 안치하였다. 설총이 절을 하니 원효상이 문득 돌아보았다. 소상은 그 이후 돌아보는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한영우선생정년기념논총 간행위원회 (2003). 「원효-영원한 새벽」.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인물열전1』. 돌베개
김성룡 (2004). 「원효의 글쓰기와 중세적 주체」. 『한국문학사상사1』. 이회
원효학연구원 http://www.wonhyo.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