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본래성과 죄 (볼트만-하이데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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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비 본래성과 죄 (볼트만-하이데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비 본래성과 죄>

1 <불트만의 실존론적 신학>

2 <하이데거의 인간 실존 이해>

3 <불트만의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에 대한 이해>

4 <불트만의 인간의 비본래성에 대한 이해 ; 하나님의 개념으로부터>

5 <인간 존재의 존재적 기초가 된 인간의 죄성>

6 <육체와 세상과 죄의 관계성>

7 <죄의 결과>

8 <인간의 타락의 상태>

9 <죄의 보편성(원죄)과 구체적 죄성>

10 <죄 이해에 대한 불트만의 해석에 있어서 ‘죄’와 ‘죄들’>

11 <결론적인 생각과 평가>

본문내용

그리고 탈선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만약 누군가가 죄를 짓게 되면, 그는 곧 죄의 노예(요8:34)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리고 만약 누가 이 세상이 죄에 물들어 있다고 말하면 세상은 그를 비웃거나 아니면 그에 대해 격분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스스로 선하다고 주장하는 세상 자신의 자의식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를 심판하는 것과 관련된 것은 개개인의 임의적인 태도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영속적인 근본태도(Grundhaltung)라는 것, 즉 악한 행동뿐만 아니라 선한 행동에 대해서도 동시에 해당되는 태도라는 것을 사람들은 관심하지 않고 있다.
세상 자체의 유한성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것, 세상의 요구와 세상이 주는 선물 안에서 세상을 전능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 그리고 세상이 하나님의 은총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세계로부터 세상에 열려져 올 은혜에 대해 자신을 차단시키는 것, 이런 것들이 곧 죄이다.
그렇다면, 이제 복수로서의 죄(Sunden)는 단수로서의 죄(Sunde)에 어떻게 관련되는 것일까? 우선 복수로서의 죄가 그 총체이며 그것이 단수로서의 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분명하다. 왜냐하면 단수로서의 죄는 항상 이미 현재하고 있으며, 또한 그 분명한 태도에 있어서 복수로서의 죄와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가 불신앙에 있을 때, 즉 죄 안에서 살고 있었을 때를 되돌아보면서 말하기를, 그는 율법의 성취 즉 개인적으로 죄들을 짓지 않고 사는데 있어서는 당시 그의 많은 동년배들 보다 앞장서 있었다고 했다.(갈1:14 ; 빌3:6)
바울은 단수로서의 죄와 복수로서의 죄의 관계를 설명할 때, 인간들은 그의 죄(Sunde) 안에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헛된 것으로 돌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죄들(Sunden)에로 버려두어 쓸데없는 짓을 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인간은 불의한 것, 탐욕, 악의 등으로 가득하며 질투, 살인, 불화와 부모에게 순종치 않으며, 분별력도 신의도 없는 것이다. 이런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그런 것을 행할 뿐만 아니라 그런 짓을 하는 자들을 두둔하기까지 하는 것이다.(롬1:28-32)
이에 대해 불트만은 바울은 매 순간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열려진 가능성에 직면하여, 매순간 반복되는 배신의 원죄를 죄(Sunde)로서 이해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죄인들을 죄들(Sunden)에 버려둔다는 것은 곧 배신의 원죄는 도덕적인 과오를 필연적으로 야기시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복수로서의 죄는 단수로서의 죄의 결과이다. 비도덕은 죄(단수)의 제2차적인 결과일 뿐이며, 실로 죄에서 파생하는 제2차적인 여러 면 중 한 단면에 불과하다. 이와 관련하여 만약 어떤 사람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하여 도덕을 실천하거나, 혹은 도덕을 무기 삼아 하나님 앞에서 공로를 얻으려고 한다면 이런 도덕 역시 죄의 제2차적인 면이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만약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앙이란 것이 과거와 현재에 있어서 인간이 자기가 지은 죄의 양, 횟수 그리고 그 경중에 대해 스스로 자백한다는 의미에서 죄의식, 죄의 고백 등을 요구한다고 한다면, 그런 의미에서의 신앙은 잘못된 것이다. 인간은 그의 비도덕성에 대해 병적으로든 인위적으로든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가 없으며, 또한 선한 행위를 악한 것으로 굳이 왜곡시킬 필요도 없다.
인간은 우선 자기 존재의 근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며, 또한 그의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한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사는지 아니면 자기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 사는지 하는 점과 그의 삶이 명예를 얻으려는 분투에 의해서 지탱되어 가고 있거나 다른 이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에 의해 이리저리 부유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 삶의 무상함을 알고 이러한 노력의 희극성을 간파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의식하고 있는지 하는 점을 신중히 질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결론적인 생각과 평가>
-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바로 하이데거가 보지 못한 현존재의 퇴락(Verfallenhe it)을 더욱 순수하고 더욱 높은 차원의 ‘원 상태’(Urstand)로부터의 ‘타락’(Fall)에서, 원상태로 다시 회복하고 재창조하기 위함이시다. 이 길은 우리에게 이미 제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래성으로 돌아갈 수 있다. 즉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 우리는 자신을 이 가능성 안으로 용감히 던짐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지금 들어가야 한다. 온전한 믿음만이 우리를 이런 본래적 삶에로 투사하게 할 수 있다. 불안을 믿음으로 극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능성에 나를 용감히 던져야 한다.
- 인간의 본래적 삶은 세상의 소여성에서 탈피하여 순간순간 주어지는 성령의 늘 새로운 생명과 창조의 자유에 자신을 용감히 맡기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결코 이런 삶을 얻을 수 없다. 내가 한 알의 밀알로 죽을 때 비로서 우리의 본래적 삶, 곧 참 '나'를 비로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 세상이 주는 특징이 바로 과거에 매이게 하는 것이다. 성령은 순간 순간 새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삶 곧 죄의 삶은 자신의 삶을 써치라이트로 비추어 보면서 살라고 유혹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라고 말씀하신다. 곧 순간 순간 오직 발 앞을 비추는 등불만을 보면서 용감히 주께 자신의 삶을 의뢰하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피조물에 기대하여 안정을 얻으려는 것이 우상이며, 발의 등을 보지 않고 써치라이트롤 보면서 살아가려는 인간의 경향성이 바로 죄인 것이다.
- 예수님의 율법의 완성은 행위의 완전함, 곧 처분 가능한 세상의 노력을 통해 행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율법을 세상의 처분 가능한 것으로 접근하는 것 자체가 이미 방향이 잘못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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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12.29
  • 저작시기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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