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의 사상 연구 - 금오신화 중심으로 -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김시습의 사상 연구 - 금오신화 중심으로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연구목적과 방향

Ⅱ. 본론
1. 김시습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
2. 금오신화에 나타난 儒佛道 사상
3. 김시습에 대한 평가

Ⅲ. 결론
-김시습의 사상에 대한 고찰과 재조명

Ⅳ. 참고문헌

본문내용

나를 따라 하늘나라 궁궐에 올라가지 않겠느냐?)라 하였는데 여기서 신선이 된 지가 수천년이 되었다 함은 불노장생을 희구하는 비현실적 신선사상을 말함이다.
遂提携引我, 至于所居, 作別館以待之, 餌我以玄洲不死之藥. 服之累月, 忽覺身輕氣健, 然, 如有換骨焉<취유부벽정기> 上揭書, p.74~75
(그 분은 마침내 나를 이끌고 당신이 살고 계시는 곳으로 가서 별당을 지어 살게 해주시고 또 나에게 삼신산의 불사약을 내리셨소. 그 약은 먹은지 몇 달이 지나자 문득 몸이 가벼워지고 기운이 건강해지더니 날개가 나서 신선이 되는 듯 했소)라고 하여 불사약을 먹고 不老得仙하였다는 것은 도교의 궁극목적인 장생불사하는 신선사상을 말함이다.
豈如履靑冥白鸞, 淸香於丹桂, 服寒光於碧落, 遊玉京, 遊泳銀河之勝也?<취유부벽정기>(하늘나라에 올라와서 흰 난새나 타고 계수나무 밑에서 맑은 향기를 맡고 창공에서 달빛을 띠고 옥경에서 즐겁게 놀고 은하수에서 멱감는 것만 하겠소?)라고 한 것은 모두 자유로운 몸으로 선경을 소요한다는 신선생활을 표현한 것으로 도교의 속언인 신선생활을 나타낸 것이다.
前朝有韓生者, 少而能文, 著於朝廷, 以文士稱之. 嘗於所居室, 日晩宴坐, 忽有靑衫頭郞官二人, 從空而下, 俯伏於庭曰: “瓢淵神龍奉邀.<용궁부연록>
(고려때 한생이 있었는데 젊어서부터 글을 잘 지어 조정에 이름이 알려져서 문사로 평판이 있었다. 어느날 한생이 거처하는 방에서 해가 저물 때까지 편히 쉬고있었더니 문득 청삼을 입고 복두를 쓴 관원 두 사람이 공중으로부터 내려와서 뜰 밑에 엎드렸다. “박연목의 용왕께서 모셔오란 분부이십니다.)라 하였으니 하늘에서 사람이 내려오는 것 등은 신선계에서나 가능한 것이므로 여기에서 신선사상이 나타난다.
4. 김시습에 대한 평가
김시습에 대한 작가론적, 작품론적 혹은 비교문학적 연구가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는데, 이런 다양한 해석은 지금 뿐만이 아니라 조선 유학의 쌍벽 이퇴계와 이율곡에게서 그의 상반되는 평가를 살펴 볼 수 있다.
허봉이 이황에게 묻기를 “세상 사람들은 매월당이 중옷 입은 것을 가지고 볼 것 없다고 하지만 제 생각에는 매월당이 세상을 도피한 절개는 진실로 볼 것 없다고 하지만 제 생각에는 매월당이 세상을 도피한 절개는 진실로 중요의 도리에는 합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몸가짐이 청고한 데 합하고 물러감이 權道에 합했다고 하겠는데 이렇게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매 대답하기를 매월당은 남다른 하나의 異人이요, 索隱行怪에 가깝지만 만난 세대가 마침 그러하여 드디어 높은 절개를 이루었을 뿐이오”하였다. 매월당집 부록 1 諸子雜記 p.465
이에서 보면 허봉은 김시습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세상의 평가에 반대하여 그의 인품을 높이 평하고 있다.
그러나 퇴계와는 달리 율곡은 김시습을 인간적으로 높이 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생각해보면 그 사람의 재주가 그릇 밖에 넘쳐서 능히 스스로 잡지 못했으니 그 기 받은 것이 經情한 것에는 풍성하고 중후한 데는 인색하였던 것이 아닌지요? 비록 그러하나 절의를 표방하고 倫紀를 붙들었으니 그 뜻을 궁구해 보면 가히 日月과 빛을 다툴 것이며 그 風聲을 들으면 나약한 사람도 또한 입지가 있어 즉 비록 백대의 스승이라 하여도 또한 근사할 것입니다. 이이 매월당집 김시습전 p.11
이는 퇴계와는 달리 김시습을 극찬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율곡의 평은 매월당집서를쓴 이산해와도 일치한다. 이러한 김시습 개인뿐만이 아니라 작품에 대한 평가도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다.
퇴계는 “금오신화의 類는 가히 高見遠識으로 허락할 수 없다.” 이황 퇴계집 퇴계선생언행록
고 하여 이를 핍박하는 듯한 말을 했으니 이는 도학군자로 당연한 평일 것이다. 그러나 조기영편 생육신집에 부록된 잡기에서는 “금오신화 중에 남염부주지가 소설의 제1이다. 대개 전등신화를 답습하지만 出語가 그것보다 뛰어나니 어찌 청출어람에 그치겠는가! 조기영편 생육신집 부록상 p.52
하여 이를 무엇보다 높이 평가함을 볼 수 있다.
Ⅲ. 결론
지금까지 김시습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을 통하여 그의 사상이 나타나게 된 동기를 알아보고, 금오신화를 통하여 사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여 김시습을 다양한 각도로 평가해보았다.
시대적 상황에서 볼 때, 그는 조선조 초기에 새로 일어나는 신진사대부의 동반자로서 굽힐 줄 모르는 정치적 지식인으로 말미암아 타협과 항거의 양극을 방황하면서 고민하는 인간상을 보여주었다. 척불숭유의 정치적 폭풍 속에서 이 상반되는 사상체계를 합치시키는데 성공한 철학자로서의 면모을 띠고있기도 한다. 즉 그는 새로운 지도이념인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고 민족의 종교적 신앙과 사상문화를 독점하여 온 불교를 유교와 합치점을 발견하여 특이한 사상적 체계를 확립하였다는 데에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의 생애를 통해 볼 때, 전반적으로 유교사상을 추구하고 있지만, 세조가 왕위에 오르고 단종이 죽음에 처하자,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방랑자가 되어 불교나 도교를 통하여 정신적 안정을 이루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유교에 벗어난다고 하여 일부 유학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유교에 밑바탕을 두고 불교와 도교를 수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김시습이 사회에 대한 의지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는 현실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결국 굳은 의지와 자신의 독특한 사상적 체제를 이루면서 세상을 폭넓게 수용했던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편중해서 하나의 고정된 사유체제를 만들고 그 외의 것을 부정하였던 당시의 집권층에 비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에서 자유로운 사고를 했던 시대의 반항아 김시습...
그가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이 바로 주체성 있는 창조적인 삶과 사고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Ⅳ. 참고문헌
▷「고전소설연구」 국어국문학회 편, 정음문화사, 1986
▷「금오신화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진란, 1990
▷「금오신화 연구」 인하대학교 교육대학원, 조동천, 1986
▷「금오신화 연구」 벽동환 저,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3
▷「매월당 김시습 금오신화」 김시습저 심경호역, 홍익출판사, 2000
▷ 「금오신화」 한국고전연구회저, 시간과공간사 1989
  • 가격1,6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8.11.25
  • 저작시기2018.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071335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