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대역사학의 성립 및 발전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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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시작하는 말

2. 한말 계몽주의 역사학
1) 전근대 역사학의 전반적 성격
2) 실학적 역사학의 성격

3. 일제 식민주의 사학의 침투

4. 근대민족주의 사학의 성립발전과 반식민사학
1) 근대민족주의 사학의 성립
2) 반식민사학의 분화

5. 마치는 말 - 역사학계의 그 후의 동향

본문내용

히 한 것과는 달리, 실증주의사학은 오히려 그 실증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밝혀진 개별적인 사실들을 서로의 관계 속에서 혹은 전체 속에서 규명하고 해석하는 것에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학문을 거의 전업으로 했던 실증주의사학자들은 해방 후 대학의 강단에 진출함으로 그 후 한국역사학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5. 마치는 말 - 역사학계의 그 후의 동향
해방과 분단은 역사학계에 변화를 일으켰다. 민족주의사학자들은 해방된 국가에서 새로운 사명들을 부여받게 되어 학문의 장을 떠났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을 교조적으로 적용하려는 학자들은 민족 분단과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더 이상 남한에서 그들의 역사이론을 펼 수 없게 되어, 대부분 북한으로 옮아갔다. 그러나 1960년대를 전후하여 남한에서도 사회경제사 연구를 강조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거의 실증주의사학자들만이 해방 후 대학 강단에 서게 되었다. 실증주의사학자들은 앞서의 다른 두 학맥보다 이념지향적이 아니었고 대학 졸업 후 학문활동에 종사해 왔기 때문에 미군정하에서 비교적 쉽게 대학에 진출할 수 있었다.
분단된 국사학계는 민족의 공통적인 문제를 두고 고민하기보다는 분단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형펀이었다. 실증주의사학자들에 의해 주도되는 남한의 국사학계는 민족과 이념이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북한은 사회주의 이념과 사회발전단계설에 입각한 국가건설을 위해서는 역사학계의 이론적인 도움이 필요하였다. 때문에 일찍부터 북한의 역사학은 권력과 유착되거나 그 통제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북한정권 성립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민족해방투쟁사 연구에 처음부터 역점을 두는 한편 역사발전단계설에 따라 북한 '사회주의' 정권의 역사적 위치를 설정하도록 시대구분문제에 몰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 북한의 역사학계는 해방 초기부터 일제 식민주의 사학을 극복해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남한의 경우 친일파 문제에 대한 진통이 계속되는 동안 그것이 여의치 않았다. 그러다가 4.19혁명 후, 민족주의의 고양으로 민족주의사학이 기지개를 켜는 한편 사상통제가 어느 정도 완화되면서 사회경제사 연구의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식민주의사관의 극복문제가 대두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 전국역사학대회에서 '조선후기 실학의 문제'를 토론하면서 실학시대의 '자본주의 맹아론'이 제기되어 '정체성 사관'의 극복문제가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경우, 시대구분론 문제 등 사회경제사 연구의 토론과정에서 비교적 일찍이 식민주의사학의 극복에 나섰다. 더구나 북한은 1960년대 주체사상을 강조함에 따라 주체사관 수립에 열을 올렸는데, 그 결과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이 한때 배격했던 신채호 등의 민족주의사학을 수용하는 일면도 나타났다.
남한의 역사학은 사회변동에 따라 변화를 겪고 있다. 1960년대에는 식민주의사학의 극복문제와 맥락을 같이하는 '自生的 近代化論(자본주의 맹아론)'이 제기되었고, 1970년대 후반부터는 '民衆史學論'이 뜨겁게 달아올라 그 후 국사학계에 파괴와 건설의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는 독립운동사와 공산주의운동사를 포함한 일제강점기에 대한 연구가 '解禁期'를 맞게 되었으며, 1980년대말부터는 소위 '植民地 近代化論'이 대두되면서 90년대 들어서서 학계의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특히 '식민지 근대화론' 논쟁과 관련하여, 그간 한국의 역사학계가 진정 식민주의사학 극복을 위한 연구와 일제강점기에 대한 연구를 제대로 하였는지에 대한 뼈아픈 반성이 앞서게 된다.
그동안 남 북한의 민족사인식에는 상이점이 또한 적지 않다. 우선 고대사에서 '민족기원' 문제와 관련하여 현격한 견해차이를 보이고 있다. 시대구분론에서도 많은 차이점이 보이는데, 남한의 경우는 학계의 속성상 어느 확정된 정설을 내놓기가 곤란하지만, 북한의 경우 그들의 집단연구가 내놓고 있는 시대구분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과 주체사관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남북한이 공유해야 할 '독립운동사' 혹은 '민족해방투쟁사'와 이를 다루고 있는 근 현대사는, 북한의 경우 김일성의 가계중심으로 엮어놓았기 때문에 어디에서부터 그 진실과 허구, 과장과 축소를 수정, 보완해야 할 지 엄두가 나지 않을 형편이다. 분단시대가 만들어 놓은 '분단사학'의 현실이다.
최근 민족통일 문제가 논의되고 있는 시점에서, 통일에 앞서 우리 민족사를 공유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게 제기되고 있다. 50여년간의 분단상황이 민족사를 이렇게까지 이질화시켜 놓은 것이 사실이고 보면, 이 시대의 역사가는 통일지향의 역사학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노력은 지금까지의 연구업적을 먼저 공유하는 한편 남북간의 다른 어떤 만남에 앞서 남북의 역사학자들이 먼저 만나야 한다. 그리하여 통일된 조국이 공유할 수 있는 민족사를 수립하기 위해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그 토론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어 있는 역사뿐만 아니라 해방 후 50여년간의 남북의 역사도 포함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북의 정권은 남북의 학자들이 만나 자료를 교환하고 진지한 토론을 통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민족사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보장해야 할 것이다. 유한한 정권은 민족사에 봉사할 때에 비로소 그 가치가 역사에 인정받을 것이다.
참고문헌
韓永愚, 1994 「한국 근대역사학과 통일을 위한 과제」『韓國民族主義歷史學』
한영우, 1994 「이병도」『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하)』.
趙東杰, 1995 「1945∼50년의 韓國史硏究」『제2회 國祭學術會議論文集』,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내재적 발전론'은 한국인의 연구로는 1930년대에 자본주의 맹아를 추적한 白南雲의 연구, 일본인의 연구로는 1950년대에 조선 자체의 발전 구조를 추적한 旗田巍의 연구가 그 시발점으로 알려져 있다.
近代史硏究會, 1987 「總論: 한국근대역사학과 조선후기사 연구」『韓國中世社會 解體期의 諸問題』상.
盧泰敦, 1993 「해방 후 民族主義史學論의 展開」『現代 韓國史學과 史觀』.
金仁杰, 1997 「1960, 70년대 '內在的 發展論'과 韓國史學」『韓國史 認識과 歷史理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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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1.24
  • 저작시기20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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