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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최치원사상][최치원의 생애][최치원의 업적][최치원 관련 자료 검토][최치원 관련 설화]최치원의 생애, 최치원의 업적과 최치원 관련 자료 검토 및 최치원 관련 설화 분석(최치원, 최치원사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최치원의 생애

Ⅲ. 최치원의 업적
1. 시문과 사산비명
2. 풍류도 사상의 체계화

Ⅳ. 최치원 관련 자료 검토

Ⅴ. 최치원 관련 설화

참고문헌

본문내용

그 가치를 입증하여 민족적인 긍지를 심어 주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지성과 사상을 대표할 만한 위인이라 할 수 있다.
Ⅳ. 최치원 관련 자료 검토
최치원이 생존하였던 신라말기의 정신적인 변화현상으로써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불교계에서의 선종의 대두였다 이 선종은 종래의 학문불교인 화엄종의 한계와 모순을 비판하면서 기성의 사상체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색을 통하여 진리를 깨달을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선종의 사회적 기반에 있어서도 중앙의 진골귀족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화엄종과는 달리 선종은 새로 지방에서 성장하고 있었던 호족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점에서 자연 선교의 싸움은 중앙의 진골귀족과 지방의 호족세력의 대결이라는 사회적 성격을 갖게 하였다. 1970년대 초 역사학계에서의 나말여초의 사회변화에 대한 관심의 고조에 상응하여 불교계의 변화에도 새로운 관심이 기울여지게 되었다. 앞에서 제시한 바, 필자에 의한 최치원의 사산비명에 대한 분석은 이러한 학계의 분위기에 자극받은 결과였다. 이 결과 최치원은 유문말학 또는 부유라고 자처하였던 것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자신은 유학자로 자처하면서도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선종의 대두를 크게 주목하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사산비명 가운데 3개가 지증대사 도헌, 낭혜화상 무염, 진감선사 혜소 등 선승들의 탑비명이거니와, 그 가운데 특히 지증대사비문에서는 신나선종사를 간명하게 기술하면서 화엄종에서 선종으로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치원이 불교 가운데서 관심을 가진 것은 선종만이 아니었다. 그는 화엄종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져 사산비명 가운데 대숭복사비문은 신라의 하대왕실과 밀접하게 관련된 화엄종 사찰의 창건에 관한 기록이며, 그리고 은둔하기 전후하여서부터는 화엄종 사찰들인 불국사와 해인사에 관련된 글을 집중적으로 남기고 있어서 오늘날 확인되는 것만도 20여 종에 이르고 있다. 특히 말년 해인사에 은거하면서 그에 관한 글을 많이 남겨주어 신라말기 화엄종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여 주고 있다. 앞에서 제시한 바, 금복순의 불교 관계 자료의 검토는 주로 화엄종 관계의 최치원 저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거니와, 법장화상전 부석존자전 석순응전 석리정전 등은 모두 화엄종 승려들의 전기이고, 그 가운데 신라승들은 모두 해인사에 관련된 인물이었음이 확인된다. 이로 보아 최치원은 신라 화엄종의 주류를 의상-신림-순응-이정-희낭으로 이어지는 해인사 계통으로 파악하고 있었지 않았는가 추측한다. 뒷날 희랑의 법손 가운데서 균여가 출세하여 고려 광종의 후원을 받으면서 북악파와 남악파로 분열된 화엄종단을 통합하였던 사실을 고려하면 최치원의 화엄종 관계 자료의 중요성을 새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며, 앞으로의 본격적인 검토가 요구되는 문제라고 아니할 수 없다.
Ⅴ. 최치원 관련 설화
최치원은 당나라 유학을 가서 과거에 급제하여 초현관에 나가서 노닐다가 두 여인의 무덤을 보고 위로의 시를 지어 석문에 붙였다. 그 시를 다시 한번 감상해보자.
어느 집 두 처자 이 버려진 무덤에 깃들어
쓸쓸한 지하에서 몇 번이나 봄을 원망했나.
그 모습 시냇가 달에 부질없이 남아 있으나
이름을 무덤 앞 몬지에게 묻기 어려워라.
고운 그대들 그윽한 꿈에서 만날 수 있다면
긴긴 밤 나그네 위로함이 무슨 허물이 되리오.
고관에서 운우를 즐긴다면
함께 낙천신을 이어 부르리.
이 시는 쓸쓸히 무덤에 누워 있던 두 여귀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최치원은 외로운 타양살이와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고향땅에서는 6두품이라는 이유로, 이국땅에서는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소외를 당하고 있던 처지였다. 두 여귀는 어떠한가. 이들은 재물만을 탐해 자기들을 부유한 장사치에게 시집보내려는 부모에 맞서다가 한을 품고 죽은 여인들이다. 서로의 외로움은 결국 그날 밤 두 여귀와 주인공을 만나게 하는 이유로서 충분하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며 하룻밤을 보낸 이들의 만남은 최치원에게는 이승에서는 알아보는 이 없는 자신의 능력을 알아보는 여인과의 만남이며, 여인들에게는 이승에서는 만난 적 없는 어진 베필을 만난 것이다. 이들의 만남은 실로 뜻깊다. 현실세계에서는 만날 수 없는 만남이 이승과 저승으로 나뉘어 만나게 되었으니, 이런 점에서, 고독한 인물끼리의 하룻밤 만남은 바로 세계와 화합할 수 없었던 이들이 만들어낸 역설적인 만남인 셈이다. 하룻밤을 같이 하고, 새벽닭이 울자 이별의 순간이 다가온다. 여귀들은 이별을 아쉬워하는 시를 남기며, 최치원은 첫 만남, 하룻밤의 운우지정, 그리고 이별 후의 감회를 장편의 시로 곡진하게 그려낸다.
늘 나그네 시름으로 화창한 봄날 원망했는데
하물며 이별의 슬픔 안고 그대들을 그리워함에랴.
인간 세상사로 근심 많던 사람,
비로소 통하는 길을
들었는데 또 나루를 잃었도다.
잡초 우거진 동대엔 천년의 한 서려 있고,
꽃 핀 금곡은 하루아침의 봄이로구나.
완조와 유신은 보통사람이고,
진황제와 한무제도 신선이 아니네.
최치원은 이 두 여귀와의 하룻밤 만남과 이별을 통하여, 부귀공명을 향해 내달리던 삶이 부질없음을 깨달았다. 조조가 호령하던 동작대도, 금곡의 꽃도 하루아침의 봄일 뿐, 그는, 이 만남이 주고 간 깨달음으로 중국을 뒤로하고, 고국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다짐하는 것이다.
뜬 구름 같은 세상의 영화는 꿈속의 꿈이니,
하얀 구름 자욱한 곳에서 이 한 몸 좋이 깃들리라.
이러한 그의 깨달음은 명혼세계를 경험하고 난 후 그가 획득한, 삶에 대한 인식의 질적 전환에 다름 아니다.
참고문헌
· 김문기(1994), 최치원의 사산비명 연구, 한국의 철학, 제 22호, 1994
· 김중렬(1991), 최치원의 문학사상한국문학사상사, 계명문화사, 1991
· 양광석(1991), 삼국시대의 문학사상한국문학사상사, 계명문화사, 1991
· 이능우·최치원(1965), 신라의 지성, 한국의 인간상 제5권, 신구문화사, 1965
· 이헌홍, 최치원전의 전기소설적 구조
· 조동일(1977), 한국소설의 이론, 지식산업사, 1977
· 최영성(1990), 최치원의 사상 연구아세아문화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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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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