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도덕 심리학
특수한 정념들
자기애와 자비심
양심
자비심의 실재성
자기애와 특수한 정념들 사이의 구별
이기주의의 혼동
양심의 실재성
본성적인 질서 체계
양심에 귀 기울임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버틀러의 유산
문제점들
특수한 정념들
자기애와 자비심
양심
자비심의 실재성
자기애와 특수한 정념들 사이의 구별
이기주의의 혼동
양심의 실재성
본성적인 질서 체계
양심에 귀 기울임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버틀러의 유산
문제점들
본문내용
이런 문제들을 우리에게 소개하였다.
버틀러의 유산
우리는 버틀러에 대한 연구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많은 학자들은 그가 심리적 이기주의와 쾌락주의를 비판한 것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또한 그가 자기애와 자비심이 반드시 서로 모순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논증한 것도 자주 찬사를 받는다. 자신의 이익을 신장시키는 최선의 방법이 항상 자신의 이익을 보장해 주는 목표에 따라 행위하는 것은 아니라는 버틀러의 주장은 자주 이른바 쾌락주의자의 오류의 근원을 지적한 것으로 평가된다. 더욱이 버틀러는 결과론과 공리주의를 반박하는 수많은 논거들을 제공하고 있으며 이들은 현대에 이르러서는 거의 전통적인 것이 되었다. 그는 양심의 진술이 지니고 있는 확실성과 미래에 대한 우리의 모든 예측이 지니고 있는 불확실성을 대비하고 있다. 결과론이 우리에게 미래를 예측할 것을 요구하는 한 인간이 필연적으로 미래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사실은 결과론적인 기준을 적용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더욱이 우리가 정의나 정직과 같은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에 대하여 부여하는 확실성은―양심에 의해서 검증된 것으로서―이런 기본적 가치와 관련해서 어떤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다. 결과를 계산함으로써는 정의 등과 같은 기본적 가치들에 이러한 확실성을 부여할 수 없으며 사실 결과의 계산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기본적인 가치들을 의심스럽게 만들기조차 한다.
문제점들
그러나 버틀러의 윤리설은 여러 문제점도 안고 있다. 그는 양심에 따르는 것이 자기애에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지만 이를 확신할 만한 철학적인 근거를 제공하지는 못하였다. 그 자신이 이 주장을 확신한 근거는 순전히 신학적인 것으로서 신이 인간의 본성을 인간 자신의 선에 도움이 되도록 계획하였다는 유신론적인 견해와 관련된다. 이러한 신학적인 관점은 결국 신을 공리주의자로 만든다. 이 견해가 양심의 비결과론적인 본성과 논리적으로 모순을 일으키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는 버틀러의 철학 전반과 상당한 긴장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더욱이 양심은 본성적인 권위를 지닌다는 것과 덕이 본성에 따르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버틀러의 두 주장 사이의 관계도 불분명하며 서로 대립되는 많은 해석이 등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버틀러에 반대하는 주장들 중 가장 자주 제기되는 것은 바로 양심이라는 관념 자체의 타당성과 관련해서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앤스컴(Elizabeth Anscombe)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 동의한다. “버틀러는 양심의 지위를 크게 높였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양심이 인간에게 가장 사악한 것을 행하라고 명령할 수도 있음을 모르고 있는 듯하다.” 양심의 개념을 상당히 회의적으로 보기 위해서 도덕성이 인간의 본성보다는 오히려 신성한 법칙에 근거한 것으로 보는 앤스컴의 입장에 반드시 동의할 필요는 없다.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폭넓은 경험을 신중하게 살펴보기만 해도 양심의 명령이 각자에게 얼마나 크게 다른 것으로 나타나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며 과연 양심의 명령이 그것을 들은 각 개인이 자기 이익과 일치하는지에 대하여 상당한 회의를 품게 될 것이다. 더욱이 양심에 대한 사회학적인 또는 심리학적인 설명들도 수없이 많이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양심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들은 양심을 단지 사회화의 산물로, 따라서 사회적 통제를 위한 장치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유치한 욕구가 화려하지만 천박한 자극으로 표현된, 억압의 역학 관계의 결과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어느 경우든 도덕적 근원으로서의 양심의 지위는 크게 손상되고 의문시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버틀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경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이론 창시자들 스스로 주장한 것보다는 신뢰도가 크게 떨어지는 일반적인 이론들에 의해서 잘못 인도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대표적인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도덕적 주제들에 대해서―예를 들면 정의나 정직 등에 관해서―양심이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동일한 목소리를 전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이것이 참이 아니라고는 어느 누구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버틀러는 특수한 정념들과 자기애의 원리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통해서 왜 그리고 언제 양심이 드러나지 않는 일이 일어나는지를 설명하는데 필요한 장치를 마련해 놓고 있다. 더욱이 우리가 양심의 명령을 어겼을 때 자주 느끼는 후회와 가책은 우리가 분명히 양심의 소리를 듣고 있지만 단지 그것에 따르도록 충분히 자극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지만 양심에 관한 어떤 이론이라도 심각한 문제점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양심이 명령한 바가 둘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에 있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그들 사이의 논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어떤 기준이라도 존재하는가? 이러한 경우의 본성상 이 기준이 양심 자체일 수는 없다. 또한 양심의 명령은 얼마나 구체적이어야 하는가? 정의로운 길은 매우 좁지만 악마는 곳곳에 길을 열어놓고 있다. 도대체 어떤 특수한 행위가 정의로운가? 우리는 아퀴나스도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였음을 살펴보았는데 그는(버틀러와 달리) 양심을 옳고 그름을 직접 인식하는 능력으로 본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원리로부터 구체적인 도덕적 처방을 이끌어내는 작용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문제와 관련해서 어떤 확실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아퀴나스는 분명히 주장하고 있다.
버틀러는 아마도 양심을 윤리적 사고의 중심에 좋은 최초의 철학자일 것이다. 그렇게 함에 있어 그는 도덕성과 양심이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일반적인 동의에 의존하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양심의 이론을 존중하여야 한다는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였지만 정작 양심과 관련해서 제기될 수 있는 모든 질문들에 충분한 답변을 할 수 있는 이론 자체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 브로드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 버틀러의 윤리설이 지니고 있는 장점과 단점을 가장 잘 요약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비록 그의 체계는 불완전하였지만 그것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경험하는 사실들을 공정하게 평가할 것을 요구하는 모든 윤리적 체계의 기본 주장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버틀러의 유산
우리는 버틀러에 대한 연구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많은 학자들은 그가 심리적 이기주의와 쾌락주의를 비판한 것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또한 그가 자기애와 자비심이 반드시 서로 모순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논증한 것도 자주 찬사를 받는다. 자신의 이익을 신장시키는 최선의 방법이 항상 자신의 이익을 보장해 주는 목표에 따라 행위하는 것은 아니라는 버틀러의 주장은 자주 이른바 쾌락주의자의 오류의 근원을 지적한 것으로 평가된다. 더욱이 버틀러는 결과론과 공리주의를 반박하는 수많은 논거들을 제공하고 있으며 이들은 현대에 이르러서는 거의 전통적인 것이 되었다. 그는 양심의 진술이 지니고 있는 확실성과 미래에 대한 우리의 모든 예측이 지니고 있는 불확실성을 대비하고 있다. 결과론이 우리에게 미래를 예측할 것을 요구하는 한 인간이 필연적으로 미래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사실은 결과론적인 기준을 적용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더욱이 우리가 정의나 정직과 같은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에 대하여 부여하는 확실성은―양심에 의해서 검증된 것으로서―이런 기본적 가치와 관련해서 어떤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다. 결과를 계산함으로써는 정의 등과 같은 기본적 가치들에 이러한 확실성을 부여할 수 없으며 사실 결과의 계산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기본적인 가치들을 의심스럽게 만들기조차 한다.
문제점들
그러나 버틀러의 윤리설은 여러 문제점도 안고 있다. 그는 양심에 따르는 것이 자기애에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지만 이를 확신할 만한 철학적인 근거를 제공하지는 못하였다. 그 자신이 이 주장을 확신한 근거는 순전히 신학적인 것으로서 신이 인간의 본성을 인간 자신의 선에 도움이 되도록 계획하였다는 유신론적인 견해와 관련된다. 이러한 신학적인 관점은 결국 신을 공리주의자로 만든다. 이 견해가 양심의 비결과론적인 본성과 논리적으로 모순을 일으키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는 버틀러의 철학 전반과 상당한 긴장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더욱이 양심은 본성적인 권위를 지닌다는 것과 덕이 본성에 따르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버틀러의 두 주장 사이의 관계도 불분명하며 서로 대립되는 많은 해석이 등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버틀러에 반대하는 주장들 중 가장 자주 제기되는 것은 바로 양심이라는 관념 자체의 타당성과 관련해서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앤스컴(Elizabeth Anscombe)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 동의한다. “버틀러는 양심의 지위를 크게 높였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양심이 인간에게 가장 사악한 것을 행하라고 명령할 수도 있음을 모르고 있는 듯하다.” 양심의 개념을 상당히 회의적으로 보기 위해서 도덕성이 인간의 본성보다는 오히려 신성한 법칙에 근거한 것으로 보는 앤스컴의 입장에 반드시 동의할 필요는 없다.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폭넓은 경험을 신중하게 살펴보기만 해도 양심의 명령이 각자에게 얼마나 크게 다른 것으로 나타나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며 과연 양심의 명령이 그것을 들은 각 개인이 자기 이익과 일치하는지에 대하여 상당한 회의를 품게 될 것이다. 더욱이 양심에 대한 사회학적인 또는 심리학적인 설명들도 수없이 많이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양심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들은 양심을 단지 사회화의 산물로, 따라서 사회적 통제를 위한 장치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유치한 욕구가 화려하지만 천박한 자극으로 표현된, 억압의 역학 관계의 결과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어느 경우든 도덕적 근원으로서의 양심의 지위는 크게 손상되고 의문시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버틀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경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이론 창시자들 스스로 주장한 것보다는 신뢰도가 크게 떨어지는 일반적인 이론들에 의해서 잘못 인도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대표적인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도덕적 주제들에 대해서―예를 들면 정의나 정직 등에 관해서―양심이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동일한 목소리를 전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이것이 참이 아니라고는 어느 누구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버틀러는 특수한 정념들과 자기애의 원리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통해서 왜 그리고 언제 양심이 드러나지 않는 일이 일어나는지를 설명하는데 필요한 장치를 마련해 놓고 있다. 더욱이 우리가 양심의 명령을 어겼을 때 자주 느끼는 후회와 가책은 우리가 분명히 양심의 소리를 듣고 있지만 단지 그것에 따르도록 충분히 자극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지만 양심에 관한 어떤 이론이라도 심각한 문제점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양심이 명령한 바가 둘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에 있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그들 사이의 논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어떤 기준이라도 존재하는가? 이러한 경우의 본성상 이 기준이 양심 자체일 수는 없다. 또한 양심의 명령은 얼마나 구체적이어야 하는가? 정의로운 길은 매우 좁지만 악마는 곳곳에 길을 열어놓고 있다. 도대체 어떤 특수한 행위가 정의로운가? 우리는 아퀴나스도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였음을 살펴보았는데 그는(버틀러와 달리) 양심을 옳고 그름을 직접 인식하는 능력으로 본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원리로부터 구체적인 도덕적 처방을 이끌어내는 작용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문제와 관련해서 어떤 확실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아퀴나스는 분명히 주장하고 있다.
버틀러는 아마도 양심을 윤리적 사고의 중심에 좋은 최초의 철학자일 것이다. 그렇게 함에 있어 그는 도덕성과 양심이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일반적인 동의에 의존하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양심의 이론을 존중하여야 한다는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였지만 정작 양심과 관련해서 제기될 수 있는 모든 질문들에 충분한 답변을 할 수 있는 이론 자체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 브로드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 버틀러의 윤리설이 지니고 있는 장점과 단점을 가장 잘 요약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비록 그의 체계는 불완전하였지만 그것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경험하는 사실들을 공정하게 평가할 것을 요구하는 모든 윤리적 체계의 기본 주장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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