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실학에 대하여 [실학 사상 전개과정, 실학파 계보, 실학자, 실학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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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 후기 실학에 대하여 [실학 사상 전개과정, 실학파 계보, 실학자, 실학 종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조선후기, 과연 實學이 존재하였는가
Ⅲ. 인물을 통해 본 18세기 실학의 두 학파 - 星湖學派와 北學派
1. 星湖學派
1. 이익 (李瀷, 星湖, 1681∼1763년)
2. 안정복(安鼎福, 順庵, 1712~1791년)
2. 北學派
1. 홍대용(洪大容 : 1731∼1783 )
2. 박제가 (朴齊家 : 1750∼1815)
3. 박지원( 朴趾源 : 1737~1805 )
Ⅳ. 실학에 관한 논의 및 실학의 의의
◉ 참고문헌 및 참고자료 ◉

본문내용

론에 대항하여 박제가, 홍대용 등과 함께 북학운동을 주장했다. 병자호란 대두됐던 북벌론은 더 이상 현실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실용지학(實用之學)’을 바탕으로 홍대용의 영향을 받아 과학사상에 근거해 ‘자기 중심성’을 강조하며 종래의 화이론을 부정하기도 했다. 이는 ‘이용후생(利用厚生)’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박지원의 주장은 박제가 등과 함께 후에 개화파의 개국통상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Ⅳ. 실학에 관한 논의 및 실학의 의의
먼저, 조선후기 실학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실학’이라는 용어의 개념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실학이라는 용어는 고려 초 최승로가 불교에 대해 유교를 실학이라고 했으며 고려 말 이제현이 사장학에 대해 경학을 실학이라 지칭하기도 했다. 이렇게 실학은 단어의 뜻 그대로 도덕과 정치에 유용한 생활관과 경제관을 제공해 주는 실제적 학문이란 의미로 또 철저히 상대적인 개념에서 고려 시대부터 사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과 같이 실학을 조선 후기의 새로운 사상적 조류로 파악해서 실학이라는 명칭으로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한 것은 1930년대 박은식, 장지연과 같은 민족주의 학자들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실학’이란 이름의 그들의 사상이나 개혁안은 대부분 실현되지 않아 실질적으로 민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실학의 개념을 당시의 사회 모순을 개혁하려는 현실 참여적이고 진보적인 사상으로 본다면 조선 후기 실학은 확실히 존재했으며, 그 존재 자체로도 의미는 충분하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실학이란 것을 어느 한 시대의 사상이나 학문이 부패하고 공허해지는 현상에 대해서 이를 극복하고, 그에 따른 대안을 자하는 학풍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실학’의 논의를 위해서는 ‘실학’의 범주 설정이 중요하다. 우리가 실학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스스로가 자신을 실학자라고 부른 적도 없으며 그들의 학문을 실학이라고 칭한 적도 없다. 또한 그들이 서로 모여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독자적 학파를 조직한 적도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실학사상의 유형화나 분석 연구에는 자료의 부족으로 그 인적 계보나 발생한 지역을 중심으로 한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분명히 그 한계는 있다. 그나마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 학문적 특성에 따라 중농, 중상 학파로 나누거나 토지 제도나 행정 제도의 개혁 방안에 따라 경세치용 학파와 이용후생 학파로 나누기도 하는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 사상이 여러 사람들에 의해 또한 그 영역이 매우 광범위하기 때문에 사실 그 외에도 분류 기준을 어떻게 삼느냐에 따라 결과는 더욱 다양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굳이 실학 경향을 유형화하거나 분류하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만큼 당시의 실학 사상이 다양하고 복합적으로 존재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올바르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실학에 대해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발전을 이끌었고 각종 제도의 개혁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민중의 대변 사상으로서 민생의 안정, 발전에 기여했다고 평가해왔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실학이 사회변혁 이념으로서 그 역할이 미흡했다는 신중론이 대두되었다. 즉, 실학자들은 자신의 현실 개혁안을 정부 당국에 제시하여 이를 관철시킬 통로를 모색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견해를 조정이나 사회의 공론으로 만들기 위한 구체적 노력도 하지 않았음을 비판하고 있다. 또한 실학 사상이 19세기 중엽에 사회 개혁적 의지가 약화되고 철학 사상적으로 성격을 전환하였다는 점을 지적하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결국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실학이 일반적으로 \'탈성리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긴 하나, 말 그대로 주자의 성리학을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즉, 출발은 성리학에 있었기에 실학자들은 자신의 개혁안이 현실의 체제 안에서도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후기의 실학자들은 당시의 권력구조와 사회질서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데는 실패하는 한계점을 남겼다.
실학의 의미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규정하고 평가 내려야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당대 어떤 의미를 가졌으며 당대에는 어떻게 인식, 평가 내려졌고 실학이 그 이후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밝히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실학자들의 조선의 중세 철학을 대변해주는 성리학 극복 노력은 후대에 객관적 자연관, 평등한 인간관을 이해하는데 제한된 범위나마 도움을 주었다. 또한 당시 사회가 가진 제반 모순들인 토지. 군역 제도의 폐단, 환곡 수취상의 문제점, 신분제나 노비제의 모순을 지적하여 현실개혁을 직접 끌어내지는 못했더라도, 현실개선의 필요성 강조하고 개혁을 향한 여론 조성의 기초 마련하였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실학은 士農工商의 성리학적 직업관에서 탈피하고자 평등한 직업관을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세습적인 신분보다 개인의 능력과 자질을 중시하는 인간 평등의 길을 열어주었다. 또한 실학자들의 성리학적 문화관에서 벗어려는 노력은 맹목적인 화의관에서 탈피하여 문화의 자존의식 및 민족의식을 갖도록 해주었다. 이를 통해 자주적인 역사 의식과 국학 연구가 활발히 대두되었으며 문화예술 분야에 있어서도 민족주의적 모습이 뚜렷해졌다. 실학자들의 현실에 대한 관심 및 현실 개혁 사상은 그것이 비록 완전 ‘근대’라고 불릴 수는 없겠지만 ‘근대로의 이행’에 방향을 제시하여 주었으며 이후 개화사상 및 동학 농민 운동,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실학의 큰 의의를 찾아볼 수 있겠다.
참고문헌 및 참고자료
『순암 안정복의 학문과 사상 연구』, 강세구 著, 도서출판 혜안, 1996.
『한국사 9』, 강만길, 김남식 외 편, 한길사, 1994.
『다시 찾는 우리역사』, 한영우 著, 경세원, 1997.
http://kr.encycl.yahoo.com/final.html?id=102904
http://210.217.248.140/woodway/human/korean/an-jeongbok.htm
http://kms4282.new21.org/e2k/ezboard.cgi?db=geundae&action=list&page=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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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7.09.13
  • 저작시기20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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