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관상과 조선왕조실록으로 본 공신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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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영화 관상과 조선왕조실록으로 본 공신세력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좌익공신(佐翼功臣)은 누구인가?

Ⅲ. 좌익공신이 나라에게 받은 재산
1. 좌익공신에 올라 얻은 보상
2. 또 다른 충성으로 얻은 이익
3. 세조 이후에도 계속된 富

Ⅳ. 맺음말

본문내용

(永世)토록 전할 수 있도록 하라.“
성종실록 128권, 성종 12년 4월 20일 갑자 4번째 기사
호조(戶曹)와 형조(刑曹)에 전지(傳旨)하여, 주문사(奏聞使) 한명회(韓明澮)에게 노비(奴婢) 아울러 8구(口)와 전지(田地) 50결(結)을 내려 주게 하였다.
달이 차면 기우는 법이라고 했지만, 공신세력의 대다수는 남이 모함사건을 거치며 더욱 성장하여 죽을 때까지 부귀를 누린다. 심지어 공신세력의 일부는 죽은 후에도 전지가 하사되었을 정도였다.
좌익공신들은 나라로부터 계속 토지를 받아 한명회의 경우 나라에서 받은 토지가 무려 410결에 달했으며, 신숙주도 360결을 받았고, 위의 사료에서 언급되는 공신들도 받은 토지가 최소 200결 이상이다.
또한 “익대 o등 공신(翊戴等功臣) ooo의 후손(後孫)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함이 있을지라도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는 일종의 면책권을 부여하여 공신들이 반역을 일으키지 않는 한 자신의 토지와 사가에서 왕과 같이 군림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이들은 세조가 만든 원상제를 통해 한명회·신숙주를 비롯한 다수의 공신들은 세조 말년부터 성종 7년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 한명회는 명나라 사신이 왔을 경우 자신의 사택으로 불러들여 왕과 같은 권세를 뽐냈다.
역사교과서에서 훈구세력이 사라지고 사림세력이 집권한 것처럼 서술했기 때문에, 훈구세력이 절멸된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절멸된 것이 아니라 공신세력들이 나이가 들어 죽으면서 후손들이 사림세력에 자연스럽게 흡수된 것이지 대규모로 멸문지화를 당한 적은 없었다.
Ⅳ. 맺음말
공신들은 토지를 늘려갔고, 대토지 경영에 필요한 노비 또한 증대시킴으로서 국가재정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토지에서 나오는 이익이 경작자인 백성과 나라에 돌아가지 못함으로서 나라가 전체적으로 가난해졌고, 노비가 늘어나면서 국가에 세금을 내는 백성의 수가 줄어들었고, 군사의 수도 줄어들게 되었다. 그들은 단지 토지에 영향을 끼친 것만이 아니었고, 조선 전기 전반에 걸쳐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물론 임진왜란과 같은 큰 사건이 모두 공신세력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으로 인해 대규모 농장지주가 늘어나고, 재산을 쌓는 양반들이 늘어나게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생각한다.
“그들의 선택이 생사의 기로에 놓인 상황이라 세조를 따르지 않는 경우 죽음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공신들이 대부분 뛰어난 인재들이었기에 자신의 뜻을 만개하기 위해 그랬을 수도 있다”라 변명하는 식의 서술도 교양수준의 책에서 가끔 보인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세조의 즉위는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해도, 공신세력이 된 후에 절멸된 가문의 처자와 토지를 빼앗고, 면책권을 방패삼아 권세를 누리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나? 대규모 농장을 건설하여 국가의 재정을 갉아먹고, 노비를 대규모로 양산하여 국가의 국력을 깎아먹은 것은 옳은 선택이었나?”
설마 이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일제 강점기 친일파의 생각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일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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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21.02.01
  • 저작시기2017.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144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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