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의 인물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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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는 전체관념 속에 자기를 막연히 해소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국민으로서의 입장을 깨닫는 것이다. 즉,
국민으로서 올바르게 국체와 국가에 봉사하기 위해서는 국민으로서의 자기
입장을 뚜렷하게 깨닫고 자기의 입장에서 발휘할 수 있는 데까지의 재능을
죄다 발휘해야 한다. 국가에 대한 봉공과 직역에 있어서 자기를 발휘하는
일이 표리가 일치해야 하는 것은 국민의 개인적 입장을바르게
이해함에서이다. 그런데 국민이 각자의 입장을 깨닫지 않고 국가에의 봉사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추종일 뿐이며 국책에의 진실한 협력이라고 할 수
없다.({국민문학}, 1942. 1)
백철의 견해에 의하면 개성이 배제된 국가주의, 즉 내면화되고 육화되지 못한
국민문학론이나 국가주의보다는 개성에 매개된 국민문학론이나 국가주의가
훨씬 더 엄밀한 국책에의 호응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그의 같은 글에
표현된 '일본적인 것을 체내에 받아들여 충분히 씹고 소화하여 문학 속의
살아있는 생명의 흐름으로까지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논리적으로 해명한
부분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국민문학론을 논하는 이 시기 백철의
친일활동의 특징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논지는 이후에
발표된 [문학의 이상성]({동양지광}, 1942. 6.7), [결의의
시대]({국민문학}, 1942. 11)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이 시기에도 그는
이러한 문학활동 이외에 저널리스트로서도 열심히 행하였다.
1943년 봄에 그는 매일신보 베이징 지사장 겸 특파원 자격으로 베이징으로
향한다. 그는 이것을 도피행이라고 자서전에서 부르고 있지만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베이징에 도착하여 활동하고 있을 때 그곳은
조선과는 달리 연안 지방의 독립 활동가들이 드나들 수 있었던 상황이라 조선
내에서 느끼지 못하는 긴박함을 차츰 느끼기 시작했을 것이고 세계의 현실이
그 동안 자신이 인식했던 것처럼 진행되고 있지만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전황이 일본에게 불리한 쪽으로 진행되는 것을 알아차리고
눈치만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와 비슷한 행로를
걸었던 최재서가 국내에서 더 친일화하는 것과는 달리 더 이상 강한
친일활동을 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 그의
베이징행을 단순히 도피로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점철된 백철의 친일활동은 그의 말처럼 해방 직후 공석에서의
신상발언으로 '면죄부'를 받고, 그 후 곧 문단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그리고는 3.1 문화상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받을 정도로
' ㅤㅤ■김재용(문학평론가, 연세대 강사)명사'로 활약하였다.
참고문헌
백 철, [戰場文學一考], {人文平論}, 1939. 10.
______, [內鮮由緣이 깊은 扶蘇山城], {文章}, 1941. 3.
______, [舊さと新しさ], {國民文學}, 1942. 1
INTERNET (http://plaza.snu.ac.kr/~banmin/)
조연현 趙演鉉 1920 - 1981 평론가. 경남 함안 출생. 혜화전문학교 졸업.
<문예>지 편집. <현대문학>지 주간.동국대학교 교수.초기에는 시도 썼으나 뒤에 평론과 수필에 전념. 언제나 순수 문학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투쟁하는 한편 현대문학의 사적(史的)정리에 전력했다. 65년 5.16 문예상 본상 수상,문화훈장(문화포장)을 받았다.
조지훈 趙芝薰 1920 - 1968 시인. 본명은 조동탁(趙東卓). 영양 출생. 41년 혜화 전문학교에서 불교를 배우고 39년 <문장>에 <고풍의상>으로 추천되어 문단에 나서서 청록파(靑鹿派)의 한 사람으로 46년 '봉화수''산우집''풀닢단장'등 주옥같은 명시를 많이 남겼다. 그는 자신의 작품 계열을 민족정신의 표현,자연 교감과 패여정조의 표현인 파초우,완화빈,서경과 선감각을 표현한 '마음' '고사' , 자연과 인간에 대한 寂蓼感 과 희구를 표현한 '풀닢 단장',해방후의 민족적 비분을 그린 '암혈의 노래','불타는 가슴', 자연과 인정을 노래한 '아침','풀밭에서'등 산문체 시로 나누어 말했다. 박목월 , 박두진 등 다른 청록파 시인들이 뒤에 와서 시 세계의 근본적 변혁을 가져온 데 반하여 그는 초기의 자연친화의 시 세계를 비교적 많이 유지해 왔다.고전적 제재를 가지고 민족 정서를 섬세한 언어로써 균형과 조화의 미를 이루면서 한편으로 선적인 깊이를 간직함으로써 심오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는 것이 그 시의 특징이다. 56년 자유문학상 수상,해방후 경기여고 교사,조선어학회 편찬원,서울시 문화위원회 위원,문교부 국어심의회 의원,한국 시인협회 회장,고려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했다.시비(時碑)가 세워졌다.
김춘수 金春洙 1922.11.25 - 시인. 경남 충무시 동호동 출생. 경지중학을 졸업하고 니온대한 예술과 3학년 중퇴. 통영중학교.마산고등학교 교사.마산대학 교수.부산대학 연세대학(부산분교) 강사를 거쳐 경북대학 문리대 교수. 현재 한국시인협회 회장.1946년 해방 1주년기념 사화집 <날개>에 시'애가'를 발효하면서 시작을 시작했으며,대구지방에 발행된 동인지 <죽순>에 시 '온실'외 1편을 발표. 첫 시집 <구름과 장미>가 밸행됨으로써 문단에 등단,이어 시 <산악>,<사>,<기(旗)>,<모나리자에게>를 발표,문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이후 주로 <문학예술>,<현대문학>,<사상계>,<현대시학> 등에서 창작활동과 평론활동을 전개했다. 시집으로는 첫 시집 외에 <늪>,<기>,<인연(隣人),<제일시집>,<꽃의 소묘>,<부타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타령조 기타>,<처용>,<김춘수시선>,<남천(南天)>,<근역서제>,<비에 젖은 달>,<김춘수전집>,<처용이후>,<김춘수>등과 시론집으로는 <세계현대시감상>,<한국현대시형태론>,<시론> 등을 간행,그의 초기의 경향은 릴케의 영향을 받았으며,시가 아니고서는 표현할수 없는 사물의 정확성과 치밀설 , 진실성을 추구하였으나, 50년대에 들어서면서 릴케의 형행에서 벗어나,이른바 의미의 시를 쓰게 되었으며 사실을 분명히 지시하는 산문적인 성격의 문장을 시의 형식으로 도입하였는데 <현대시학>연재 장시 '처용단장'에서 부터는 설명적 요소를 거세해버린 이미지 작품으로 변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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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3페이지
  • 등록일2002.06.28
  • 저작시기20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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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97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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