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고려의 건국과 행정구역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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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고려의 마산
목차

Ⅰ. 고려의 건국과 행정구역의 변천
Ⅱ. 군 사 조 직
Ⅲ. 역 참 과 조 운
Ⅳ. 대몽항쟁기의 마산권
Ⅴ. 원의 간섭기 마산권
Ⅵ. 왜구의 침입과 마산권

본문내용

리도 매우 짧았기 때문에 발진기지로서 활용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 고장 마산은 옛날부터 군사상으로 남쪽 바다를 지키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충지의 역할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Ⅵ. 왜구의 침입과 마산권
왜구란 대마도·구주지방의 邊民으로 부족한 생활필수품인 米穀 등을 확보하기 위하여 13-16세기에 우리나라와 중국연안에서 약탈을 일삼던 해적이었다. 왜구의 침입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으나 그 피해가 가장 심했던 시기는 고려말의 약 40년간이었다.
고려 때 왜구가 처음으로 우리 연안을 침범한 것은 고종 10년(1223년) 5월로 이 때 金州(김해)가 피해를 입었다. 이후부터 충정왕 2년(1350년)까지 약 100여년 사이에 13회에 걸친 왜구의 침입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고려는 내정의 문란, 紅巾賊의 침입, 元明交替에 따른 대외관계가 복잡하여 왜구의 침입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였다.
왜구의 침입이 본격화 되는 것은 충정왕 2년(1350년)부터이며 이후 공양왕 4년(1392년)까지 약 40여년간에 걸쳐 거의 전국적으로 피해를 입었다. 『고려사』世家 충정왕 2년 2월조에 "왜가 固城·竹林·巨濟·合浦를 노략질하니 千戶 崔禪과 都領 梁琯 등이 이들과 싸워 격파하고 적의 머리 3백여급을 斬獲하였다. 왜구의 침입이 이에 비롯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때 머리를 벤 적의 수가 3백여급인 것으로 보다 당시의 침입은 그 규모가 매우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말 빈번한 왜구의 침입으로 가장 피해가 심했던 지역은 경상·전라·충청도의 해안지역이었다. 왜구는 해안지역은 물론 내륙 깊숙이까지 침입하였으며, 심지어 서울인 開京과 가까운 昇天府·江華·하桐·禮成江까지 출몰하여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였다. 고려말 왜구의 침입회수는 모두 484회인데 이것은 고종 10년(1223년)부터 공양왕 4년(1392년)까지 169년간의 통계이다. 따라서 한해 평균 침입이 2-3회에 해당되는 기록이며 이 가운데 경남지방은 85회, 경북지방은 54회, 충남지방은 53회의 순서로 침범을 당하였다.
그리고 왜구의 침입을 가장 많이 당했던 시기는 恭愍王과 禑王 때였는데, 특히 공민왕 때의 74회와 우왕 때의 378회를 합치면 452회로 이는 전체의 침입회수인 484회의 90%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같이 왜구는 공민왕과 우왕 때에 가장 많은 침입을 하였는데 그 중에서 경남지방의 연안에 출몰한 회수가 압도적이었다. 왜구는 2-3척의 배를 타고와서 노략질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심할 때는 200-500척의 대규모 해적선단이 수천명의 인원으로 침범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 왜구의 침입목적은 征政에 있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財貨의 약탈에 있었다. 이들이 노략질해 가는 것은 주로 양곡이었으며 그 밖에도 고려 백성들을 붙잡아가는 수도 가끔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곡식을 저장해둔 官倉을 습격하고 또는 해상에서 조운선을 습격하여 양곡을 탈취하거나 인명을 살상하는 만행을 거침없이 저질렀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고려말 왜구의 침입으로 그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지역은 경상도 연해지역이었다. 따라서 우리 고장 마산도 여기에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이제 마산권을 중심으로 『고려사』에 보이는 왜구의 침입상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처음 合浦에 왜구가 침입한 것은 고종 14년(1227년) 5월 경술로 이 때 왜구는 神縣 (진해)를 공격하여 왔다. 이 때 別將 鄭金億은 군사를 미리 산골짜기에 매복시켰다가 불시에 공격을 해서 적의 머리 7급을 베고 격퇴시켰다
충렬왕 6년(1280년) 5월에는 固城 漆浦(지금의 함안군 칠원면)에 왜구가 침입하여 고기잡던 어부를 잡아간 사건이 있어서 조정에서는 대장군 韓회兪를 보내 연해지방의 경비를 강화시켰다. 같은 달에 왜구는 다시 합포에 침입하여 고기잡이 하던 어부 2명을 잡아 갔다. 그러나 이들 왜구의 침략규모는 이 때까지만 해도 소규모였다. 그로부터 70여년 뒤 충정왕 2년(1350년) 6월 정유에는 다시 왜구가 20여척의 배를 나누어 타고 합포에 침입하여 兵營을 불사르고 固城 ?會原 등의 郡을 불사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이 해는 왜구의 침범이 더욱 극성을 부린 해로 5월과 6월 사이에 전라도 順天府와 長興府가 왜구의 침범을 받아 피해를 보았다.
공민왕 원년 (1353년) 9월 임신에 왜구는 다시 50여척의 배로 合浦에 침입하였으며, 공민왕 22년(1373년) 2월 을해에 龜山(지금의 군위군 의흥면)을 침입한 왜구는 경상도 都巡問使 洪師禹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듬해 공민왕 23년(1374년) 4월 임자에는 왜선 350척이 합포를 침입하였는데 이는 마산권의 侵寇사상 최대의 규모였다. 합포에 상륙한 왜구는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고 軍營과 兵船을 모두 불사르고 5천여명의 인명을 살상하고 많은 재물을 약탈해 갔다. 이 보고를 받은 고려 조정은 都巡問使 김횡에게 책임을 물어 그를 주살하였다. 도순문사 김횡은 『고려사』姦臣列傳에 오른 인물로서 전라도 도순문사로 재직할 때에는 백성들의 재물을 마구 탈취하고 군량이나 세공을 횡령하여 착복하는 등 부정을 일삼은 인물인데 경상도 도순문사로 와서도 탐학과 비리는 여전하였다. 그러한 인물이었으니 그는 임지에 와서 임무에 충실하기보다는 오히려 탐욕에 더 눈이 멀었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을 것이다.
왜구의 침입은 우왕 때에 와서 더욱 빈번하였는데, 우왕 2년(1376년) 11월과 12월 두달 사이에 경남지방의 晋州·咸安·梁山·彦陽·機張·固城·蔚山·鎭海·班城 등의 요지가 거의 다 피해를 입었다.
특히 이해 12월에 침입한 왜구는 합포에 상륙하여 義昌·會原縣을 공격하고 민가를 방화하는 등 노략질을 일삼았으나 이곳에 부임해 있던 도순문사 曺敏修의 활약으로 격퇴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는 1월부터 3,4,5,11월까지 전후 6차례에 걸쳐 왜구의 침입을 받아 경남지방을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해 정월에 침입한 왜구는 會原倉을 습격하여 稅穀을 모두 털어갔고 11월에는 130척의 배를 동원하여 金州(김해)· 義昌을 마음껏 약탈하였다. 이같이 우리 고장 마산은 고려말에 왜구의 침입을 가장 많이 받았고 그 피해도 가장 큰 지방 중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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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2.26
  • 저작시기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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