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전남의 사회와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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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1절 무단통치기 전남의 사회와 경제

제1항 총독부의 사회경제정책

1. 무단통치의 실시
2. 식민지적 경제구조를 위한 정책

제2항 전남의 사회와 경제

1. 전남의 사회상황
2. 전남의 산업

제2절 문화정치기의 전남의 사회와 경제

제1항 총독부의 사회경제정책

1. 산미증식계획의 실시
2. 회사령의 철폐와 일본 독점자본의 진출
3. 재정정책


제2항 전남의 사회와 경제

1. 전남의 사회
2. 전남의 경제

제3절 식민지팟쇼지배기 전남의 사회와 경제

제1항 총독부의 사회경제정책

1. 병참기지화정책(1931--1937)
2. 민족말살정책의 추구(1937--1945)


제2항 전남의 사회와 경제

1. 전남의 사회

2. 전남의 경제

본문내용

한 현상과 맞물려 상거래액도 공산물이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공산액의 증가현상은 전남을 포함한 조선 전체의 현상이었다. 총독부가 조선의 공업화정책을 추구하면서 공산액은 급증하였다.
이러한 상거래액의 추이를 군별로 살펴봄으로써 도시의 상업적 현황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표> 와 같다.
<표 18> 주요 상거래지역 거래액
-------+-----------------+------------------------+-----------------------
| 1927년 | 1931년 | 1934년
-------+-----------------+------------------------+-----------------------
목 포 | 53,423,143 | 42,701,916 | 71,103,751
광 주 | 9,319,900 | 10,202,661 | 14,378,157
순 천 | 3,377,800 | 4,279,804 | 4,590,085
여 수 | 11,157,200 | 14,972,222 | 10,703,100
나 주 | 3,459,680 | 699,460 | 610,723
영산포 | 4,369,974 | 2,791,500 | 3,133,000
송정리 | 1,290,750 | 178,200 | 1,113,670
벌 교 | 6,645,146 | 1,475,500 | 3,123,100
법성포 | 2,484,505 | 1,402,397 | 2,106,399
장 성 | 1,173,200 | 895,231 | 1,047,300
담 양 | 1,149,933 | 862,370 | 1,019,374
함 평 | 1,155,996 | 876,680 | 549,350
남 평 | 1,185,423 | 273,167 | 316,500
제 주 | 1,283,908 | 818,995 | 3,983,596
장 흥 | 874,934 | 416,673 | 847,873
-------+-----------------+------------------------+-----------------------
출전: {全南の産業-- 商工}(1935)
전라남도에서 중요 상공업지역은 목포, 광주, 순천, 여수, 나주, 영산포, 송정리, 장흥, 보성, 벌교, 법성포, 장성, 담양, 제주 등지였다. 그 중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지역은 목포, 여수,광주, 순천, 영산포, 벌교 등이었다. 목포는 항구로서 이전부터 유통이 활발하였지만, 교통망의 발달에 따라 번영상황에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 즉 철도의 개통은 광주, 순천, 여수를 신흥도시로 발전하게 하였고, 다른 한편 나주, 남평, 함평 등의 古邑은 점차 쇠퇴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또한 특징적인 현상은 목포와 광주 등의 중요 도시에서 자본금을 많이 갖고 거래하는 상인은 일본인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1934년 현재 전라남도에서 자본금 3만원 이상을 갖고 거래하는 주요 상공업자는 일본인이 70명, 조선인이 23명, 일본인 주식회사가 9개소였다. 자본금의 면에서 살펴보면 90% 이상을 일본인이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총독부가 전라남도에서 공인한 상업기관은 木浦商工會議所와 産業組合이 존재하였다. 총독부는 이 기관을 통하여 식민지 상업체제를 유지하였고, 아울러 식민지 초과이윤을 수탈해가고 있었다. 전자는 목포상업회의소를 1930년 상업회의소령의 개정에 의해 商工會議所로 개칭하였으며, 1935년 현재 회원은 일본인 348명과 조선인 223명이었다. 후자는 1926년에 朝鮮産業組合令에 의해 설립되었고, 전라남도에는 8개의 조합으로서 産業組合을 구성하였다. 8개의 조합은 담양산업조합, 영암산업조합, 장흥산업조합, 포천산업조합, 구례산업조합, 제주산업조합, 영산포산업조합, 장성산업조합이었다. 그 이외에 공인되지 않은 몇 십개의 상공업 임의단체가 존재하였다. 각 지역에서는 상인들이 독자적으로 상업 임의단체를 만들어 상인 상호간의 친목 도모와 상거래를 통한 이익 증진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밖에 1930년대에 존재하였던 금융기관으로는 은행, 금융조합, 산업조합, 무진회사, 금융회사 등이 존재하였다. 銀行은 湖南은행의 本·支店, 朝鮮銀行의 支店, 朝鮮殖産銀行의 支店이 대표적이었다. 湖南銀行은 1920년에 호남재벌인 玄俊鎬가 자본금 2백만원으로 광주에 본점을 설치하고, 목포 순천 장성 보성에 지점을 설립하였다. 조선은행은 목포에 지점을 설치하고, 조선식산은행은 목포 광주 등 9지역에 지점을 설치하였다.
이 지역에서 무역은 목포와 여수항을 통해서 대부분 이루어졌다. 1910년대와 1920년대는 무역수지면에서는 수출초과가 일반적이었다. 즉 농산물과 수산물이 다수 수출되고 공산물이 수입되는 현상 속에서 수출초과가 심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서서 공산물의 수입이 늘어나면서 수입초과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李 永 鶴(한국외국어대 교수)
270매
전라남도 참고문헌
木浦商業會議所, 1913 {濟州道槪況及全南農況} 대 1권 朝-63-A32
片岡議, 1913 {寶庫の全南} 朝-63-A2
木浦誌編纂會, 1914 {木浦誌} 중 1권 朝-63-A19
北村友一郞, 1917 {光州地方事情} 179쪽 朝-63-A6
全羅南道, 1922 {全羅南道農業槪況} 중 2권(1922, 1923(소재불명)), 조-81-13
內務部勸業課, 1922 {全羅南道産業大勢} 2쪽 조-80-8
全羅南道廳, 1924 {(朝鮮)全羅南道道勢要覽} 소 1권 朝-63-A1
染川覺太郞, 1931 {全羅南道事情誌} 中 1권 朝-63-A17 (경인문화사 영인)
全羅南道, 1922-1931(?) {(全羅南道)道勢一班} 소 6권(1921,1928,1927,1931, 1932,1935)
木浦府廳, 1930 {木浦府史} 소 1권 朝-54-A6
<全羅北道>
三輪規 松岡塚磨, 1907 {富之群山} 소 1권 朝-63-A31
群山府廳, 1917 {群山府勢要覽} 소 1권
南韓鐵道期成同盟會, 1910 {湖南鐵道と群山(附,全北忠南の新日本)} 소 1권 朝-63-A23
群山日報編輯局, 1913 {全北忠南之主腦地(附,活動ノ人)} 소 1권 朝-63-A8(소재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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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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