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백제 문화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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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일본이 숨쉬는 곳 - 백제

2. 일본 고대문명의 탄생

3. 한민족의 일본이주

4. 불교의 전래

5. 백제의 문화유적

본문내용

도록 만든 원인은 이 고분의 벽화가 고구려 벽화와 양식과 내용이 놀랍도록 흡사하다는 점 때문이다. 피장 자의 신분은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40대 텐무(天武)천황인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정하고 있으며, 이는 일본 황실과 고 구려와의 관계에 대한 여러가지 추측을 낳게 하고 있다.
. 문자
일본에서 글자가 사용된 것은 공식적으로는 4세기 후반에 건너간 백제인(百濟人) 왕인(王仁)이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준 것 에서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글자를 사용한 예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금석문이나 토기 등에 새겨진 것들에서인데, 여기에서 소개되는 칠지도(七支 刀), 이나리야마고분(稻荷山古墳)출토 쇠칼, 스다하치만신궁(隅田入幡神宮), 구리거울 등은 대표적인 고시대 글자사용의 예이다.
그런데 이 고대의 유물들은 모두 백제에서 만들어져 일본에 건너갔거나 일본 거주 백제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 다.
또한 이 유물들은 제작연대에 대한 해석 등 학자들간의 논란이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칠지도(七支刀)는 거기에 새겨진 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가 좌지우지될 정도로 중요한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 아직도 일본에 삼국시대의 지명이...
아메리카로 이주한 유럽인들이 자기 고향과 유사한 지명을 신대륙에 명명(命名)한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으로 건너간 고대 한반도인들은 자신이 개척하거나 정착한 곳에 모국어로 된 지명을 붙였다. 이러한 지명은 고등안 많이 개칭되고 변하였지만 아직 도 일본 각지에는 한반도와 연관된 지명을 많이 찾을 수 있다.
'지명은 그 땅 역사의 화석'이라 한다.
고려천(考慮川), 백제역(百濟驛)과 같이 삼국의 국가명칭이 오늘날까지 일본지명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이야 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 고구려 마을 고마노사토(考慮鄕)
도쿄(東京)에서 약 1시간 거리에 위치한 사이타마(埼玉)현, 히다카(日北)시에는 고구려 마을인 고마노사토(考慮鄕)가 있다 .
이 마을은 속일본기(續日本記)에 의하면 716년 고마오잣코(高麗王若王)가 고마군(高麗郡)을 설치하고 황야를 개척하고 산업 을 일으키는 등의 치적을 쌓은데서 유래한다. 이 마을에는 고구려인들을 모신 사원인 쇼텐원(聖天院), 고마신사(高麗神社) 등이 있으며, 특히 고마역(考慮驛)앞의 장승은 이곳의 명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마을을 일군 고마(高麗)씨 일가는 간토(關東)무사들을 배출한 명가로서 오늘날까지 고구려인의 후예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들의 계보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만주를 호령하던 고구려인의 후손이 이국(異國)일본에서 그 맥을 유지하며 일본 속의 또다른 한국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 백제 마을 난고(南鄕)촌
미야자키(宮崎)현 휴가(日向)시에서 서쪽으로 40Km지점에 백제마을 난고촌이 자리잡고 있다. 백제인의 흔적은 일본 고대사 의 중심지인 나라(奈良), 아스카(飛鳥)지역에 집중되어있지만, 백제멸망과 함께 건너간 백제왕족의 한 집단(禎嘉王)이 이곳 규슈 지역에 정착하여 오늘날까지 백제인으로서의 일체감을 유지하며 살아가게 된 것이다.
9. 삼국계 고분과 유물
일본역사에서 고훈시대(古墳時代)로 분류되는 시기는 우리 역사에서 삼국시대에 해당하는데, 이 시기 삼국간의 치열한 항쟁 은 일본으로의 이주를 촉진시키는 원인이 되었고, 그 결과 선진문물의 전파를 가져오게 되었다.
일본 각지에서 발견되는 고분의 양식과 부장품들의 상당수가 당시 한반도의 그것과 매우 유사한데, 이는 그 고분에 묻힌 사 람과 한반도 이주민과의 밀접한 관계, 혹은 그 피장자가 한반도인 그 자체임을 반증해 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니쟈와센총(新澤千塚) 126호분과 후지노키(藤ノ木)고분은 출토품들이 삼국의 그것과 확실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서, 이를 통해 고대 한일교류의 구체적 근거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 니쟈와센총(新澤千塚) 126호분
1962년 발굴 조사된 니쟈와센총은 한반도계통의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었으며, 고대 삼국과 관련이 깊은 나라(奈良)지역에 위치하고 있어서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주민 집단의 무덤군으로 추정된다. 발굴조사기관인 가시하라 고고학연구소는 특히 126호분 에서 신라, 가야, 백제계의 특성을 띠고 있는 유리공예품 등의 유물이 출토된 점에 미루어 이 고분을 5세기 후반 삼국출신 귀족 의 무덤으로 분류하고 있다.
. 후지노끼 고분
나라현 이카루가(班鳩)에 있는 후지노키((藤ノ木)고분은 1985년 최초 발굴 당시부터 한, 일 양국 학자간에 이 고분의 성격 을 둘러싸고 활발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그 후 총 3차에 걸쳐 실시된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안장가리개나 관장식 등의 부장품 이 삼국계통의 유물이 확인되어, 피장자가 삼국계통이주민으로 추정되고 있다.
. 고대 유물
일본에서 출토되는 고대 유물은 그것의 원류를 추적하면 삼국과 가야에까지 이른다.
5세기를 전후로 하는 시기에 일본에서 발견된 금속제 유물은 한반도에서 직접 건너간 경우가 대부분이고, 후에 일본에서 금 속생산이 시작되면서 한반도 기술의 영향하에 제작된 것이 또한 대부분이다.
특히 일본에서의 마구(馬具)의 출현은 그 자체가 한반도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물새모양 토기 등과 같은 토기(土器), 관(冠 ), 갑주(甲胄) 등 거의 대부분의 고대 유물의 양식이 당시 한반도 출토유물과 유사성을 띤다.
당시의 교통이나 여러가지 여건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고도의 기술은 간단히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러한 유물과 함께 묻힌 이의 신분은 적어도 한 집단의 우두머리 격이라고 한다면 고대의 한일관계에서 선진기술 전파의 주인공 또는 일본 상층계 급의 집단이 어떤 인물들이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 금제 장신구
일본의 철기(鐵器) 및 금동제품(金銅製品)의 생산기술은 한반도 이주민들의 새로운 기술에 의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당시 금(金)이 일본에서 생산되지 않았던 점을 고려해 볼 때, 귀걸이 등의 금제품은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것을 가져온 경우 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 마구(馬具)
일본에서 마구(馬具)의 등장은 말을 타던 한반도 이주민들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우리나라 가야지방에서 출토된 유물과 비 교해보면 이를 알 수 있다.

키워드

백제,   불교
  • 가격3,300
  • 페이지수46페이지
  • 등록일2003.01.24
  • 저작시기2003.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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