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철학. 교육의 철학적 기초. 교육철학 이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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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 2장 교육은 어떤 기초 위에서 이루어 지는가?
1.교육의 철학적 기초
1)철학적 요구와 현실적 생활
2)철학이란 말의 뜻과 그 개념
3) 교육철학의 개념과 철학의 응용(應用)
나. 교육사상의 철학적 이해
1) 이상주의 교육철학
2) 실용주의 교육철학
3) 실존주의 교육철학
4)공산주의 교육철학
다. 현대교육철학의 여러 이론
1) 진보주의 교육철학
가) 진보주의 교육철학에 대한 비판
나) 스푸트닉이 발사된 이후의 진보주의 교육철학
2) 항존주의 교육철학
가) 항존주의 교육철학에 대한 비판
3) 본질주의 교육철학
가) 본질주의 교육철학에 대한 비판
4) 문화적 재건주의 교육철학
가) 문화라. 한국교육철학의 이해
1) 한국교육철학의 연구의 뜻
적 재건주의 교육철학에 대한 비판
2) 유.불문화의 수용과 주체적 교육철학의 정립

본문내용

진춘추가 그 내용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학과는 달리 경당은 우리나라 사학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각각 고구려의 경당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어서 그 운영 방식 및 교육내용을 전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인은 유교에 심취하여 마을마다 큰 집을 지어 학교를 세워 경당이라고 칭하였다 한다. 경당은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일반 서민 및 지방 귀족의 미혼 자제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학생들은 유교의 경전을 배우며 활쏘기와 같은 무예를 익혔다. 교과서로는 오경,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 진춘추, 옥편, 학통, 학림과 문선이 있었는데, 그 중 문선을 가장 애독하였다.
백제의 교육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고대국가의 번성을 누렸던 백제는 고구려의 태학과 경당과 같은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고이왕 52년(285)에 아직기와 왕인을 시켜 일본 최초로 유학을 전할 정도로 이미 유학을 도입하여 국가 차원에서 학문의 발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박사 제도가 있어서 모시박사, 의박사, 역박사, 오경박사와 기타 각종 전문 분야의 박사들이 수시로 일본에 초빙되어 학문과 기술을 전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보아 백제에는 기록은 유실되었지만 박사를 양성하는 모종의 교육기관이 있었고 그 수준도 높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의 교육
신라 역시 기록에 전하는 교육기관은 존재하지 않지만, 민간 청년의 애국운동단체 성격을 띠고 있었던 화랑도가 존재하여 고구려의 태학처럼 인재 양성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화랑도의 기원은 알려지지 않으나 진흥왕 시대에 이르러 국가적으로 조직·훈련되기 시작해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수많은 인재들을 육성하였다. 김유신과 같은 명장도 화랑 출신이었다. 화랑도는 총지휘자격인 국선 밑에 덕망과 용의를 중심으로 화랑 3·4인 또는 7·8인을 세우고 그 아래에 문호라는 몇 개의 편성이 있어 낭도라는 이름으로 수백 혹은 수천 명의 소년 단원들을 거느리게 하였던 조직적인 단체이다. 화랑이 귀족 출신이었던데 반해 낭도의 신분에는 제한이 없었다. 이들은 평소에는 노래와 음악을 즐기며 산천을 유람하면서 도의을 연마하였고 국란시에는 소년 병사로서 나라을 위해 참전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문장가인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 언급된 바에 따라면 화랑도의 기본 사상에는 민족 고유의 풍류도와 유·불·선의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충효, 신의, 용기, 자비의 덕목을 익힐 것을 계율하는 세속오계는 그 구체적인 덕목이라 하겠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신문왕 2년(682)에 국학이라는 관학이 설립되어 예부에 속하였다. 국학은 그 운영 제도면에서나 교육과정상 당나라이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국학의 직제로서는 그 우두머리로 경 1명을 두고 그 밑에 박사, 조교, 대사 2명, 사 4명을 두었다. 국학은 15세 이상 30세 미만의 학생들이 입학할 수 있었다. 학생들은 원칙상 최대한 9년 동안 재학할 수 있었으나,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면 조기 퇴학하였고, 가능성은 있느나 미숙한 자에 한해서 수업 연한인 9년을 초과하영 머무를 수 있었다. 또한 국학에서는 통일신라이 총 17급 벼슬 중에서 12급에 해당하는 대사 이하의 관료 및 관위가 없는 자들로 학생을 충당하였고 졸업 후에는 10, 11급에 해당하는 대사마, 사마의 관위를 부여하였다. 국학은 관료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기관이었기 때문에 졸업생에게 관위가 제수된 것이라 하겠다. 국학의 교육내용은 유학과와 기술과의 둘로 나누어졌고, 박사 또는 조교가 학생들에게 해당 과목을 교수하였다. 이 중에서도 유교는 매우 중요하게 생각되어서 성덕왕 16년(717)에는 공자, 10철, 72제자의 초상을 당나라에서 들여와서 국학에 모시기도 하였다. 유학과에서는 주역, 상서, 모시, 예기춘추좌씨전, 문선을 2과목씩 나누어 가르치고 여기에 효경과 논어가 필수 과목으로 추가되었다. 기술과에서는 산학, 의학, 천문학의 3개 분야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졌다. 통일신라시대에 석굴암과 같이 정교한 건축물이 가능하였던 것으로부터 기술과에서 학습되었던 내용의 수준이 매우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학 제도는 점차 발전하여 혜공왕 1년(765)부터는 왕이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로 하여금 경전을 강론하게 하는 장학이 드물게나마 실시되기도 하였다.
삼국의 교육사상과 특징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까지는 유·불·선과 같은 외래 사상을 민족 전통의 고유 신앙 및 사상과 조화시키면서 우리의 것으로 소화시키는 기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 유·불·선 3교 중에서도 특히 유교와 불교는 독특한 성장을 거듭하여 우리나라의 전통 속으로 녹아 들어갈 수 있었다. 유교의 경전은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하는 제도 교육기관의 교육과정으로 채택되어 귀족계급이었던 위정자들의 지적·도덕적 수양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반면 불교는 당시 집권층과 사회전반에 걸쳐 큰 영향력을 지닌 내재적 교육사상이 되었다.
당시의 고승들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불교 사상과 경전을 수학하고 돌아왔으며, 원효와 같은 승려는 유학을 떠나지 않고서도 독창적인 사상을 전개할 만큼 학문이 깊었다. 당시 당나라에까지 이름을 떨친 승려들이 많이 배출될 정도로 삼국의 불교에 대한 사상적 깊이나 학문이 폭이 상당하였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학문 수학은 인재를 양성하는 제도 교육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러한 까닭에 이 시대의 불교는 비형식적인 교육면에서, 즉 국민의 도덕적 교화와 문화 창달과 같은 면에서 그 교육적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반면 유교는 정치를 담당할 인재를 교육하는 기본 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제도적인 발전을 꾀할 수 있었다. 유교는 사상적으로 큰 발전을 이룬 것은 아니었느나 충효의 기본 사상과 오경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이 이루어졌다.
이 시대의 교육사상의 특징을 형성하는 불교와 유교는 삼국시대의 교육의 특징을 결정짓고 있다. 따라서 전해지는 저서를 기초로 해서 살펴볼 만한 이 시대의 대표적인 사상가로는 원광과 의상, 원효, 설총, 최치원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교육적으로 영향력 있는 고전을 남긴 사상가는 원효와 설총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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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8페이지
  • 등록일2003.06.09
  • 저작시기20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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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23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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