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문명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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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인류의 기원

2. 구석기 문화

3. 신석기 문화

4. 오리엔트문명

5. 메소포타미아 문명

6. 동부 지중해 연안과 오리엔트의 통일

본문내용

에 구운 벽돌을 사용하였고, 따라서 후에 파괴된 것이 많다. 가장 특이한 건조물은 수메르에서 시작된 계단식 성탑, 즉 지구라트로서 이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바벨의 탑의 모델이었다고 생각된다.
메소포타미아의 과학은 어떤 면에서는 이집트의 것보다 더 발달하였으며, 특히 천문학과 수학이 그러하다. 1주를 7일로, 1일을 24시간으로 구분하는 것이라든지 60진법 등은 다 수메르 기원이다.
히타이트에 의한 제철법의 발견은 매우 획기적인 사실이지만, 철기제조는 매우 적은 편으로, 철제무기를 몸에 지닐 수 있는 것은 왕후 정도의 극히 제한된 범위에 한정되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2000년기에는 철기사용은 히타이트 왕국, 그것도 매우 제한된 범위에 한정되고, 기원전 1200년경, 즉 히타이트 왕국이 멸망한 후에야 제철기술은 오리엔트 여러 국가에 보급되기 시작하여 철기시대로 이행하게 되었다.
제 4절 동부지중해 연안과 오리엔트의 통일
해상민족
기원전 13세기로부터 12세기 초에 걸쳐 오리엔트 세게는 전환기를 맞이한다. 카시이트족의 지배 하에 쇠퇴의 길을 걷고 있던 바빌로니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오리엔트 세계를 주름잡고 있던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다 같이 기원전 1200년을 전후하여 쇠퇴 내지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 쇠퇴의 여러 가지 원인 중에서도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이른바 해상민족의 침입과 약탈이다.
이 해상민족의 정체는 현재로서는 분명하지가 않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기원전 12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발칸반도 북부에서 일어난 여러 종족의 이동에 휩쓸리거나, 그 압력을 받은 주변종족의 일부가 잡다하게 결합하여 히타이트를 비롯하여 동부지중해와 에게해, 그리고 이집트 등을 침공하고 약탈을 자행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 해상민족은 히타이트나 이집트와 같은 강대국에 직접, 간접으로 타격을 가하여 쇠망하게 함으로써 오리엔트세계에 큰 전환기를 마련하게 된다.
페니키아
기원전 2000년기 말부터 1000년기 초에 걸쳐 활동한 동부 지중해 연안의 작은 나라들 중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페니키아와 헤브라이이다.
페니키아는 셈어족계통의 사람들로서 시리아의 지중해연안에 여러 상업도시를 세우고 지중해를 무대로 교역과 식민지 건설에 활약하면서 문화전파에 공헌이 컸다. 후에 로마와 자웅을 겨루게 되는 카르타고는 기원전 9세기 말경에 페니키아가 건설한 식민지였다.
헤브라이
아라비아 사막의 유목민이었던 헤브라이인은 기원전 2000년 중엽부터 지금의 팔레스타인 지방, 즉 이른바 약속된 땅인 가나안으로 이동해 와서 기원전 11세기 말경에는 왕국을 건설하였다. 한편 헤브라이인의 일부는 수 세기 동안 이집트로 건너가 살았으나 파라오의 압박에 견디지 못하여 모세의 인솔 하에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너 이집트를 탈출하였다. 이때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여호와로부터 받았다는 십계명은 헤브라이인 전체를 인신교적인 여호와 신앙으로 결합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가나안에 자리 잡은 헤브라이인이 왕국을 건설할 때까지의 과정은 결코 안이한 것은 아니었고, 특히 인접한 필리스타인인과의 투쟁은 끈질긴 것이었다. 최초의 왕이었던 사울을 계승한 다비드는 필리스타인인을 격파하여 국토를 넓히고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아 국가의 통일을 강화하였다. 이와 같이 튼튼하고 부강해진 나라를 물려받은 솔로몬은 평화주의를 표방하고, 교역에 힘써 영화를 누렸으나 사치스럽게 음란한 이교적인 기풍이 스며들어 종교, 도덕에 타락이 싹터 말년에는 북의 이스라엘, 남의 유다로 국가가 분열되었다. 그 후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게 정복되고, 다시 유다도 신바빌로니아에게 정복되었다.
아시리아와 페르시아
동부 지중해 연안의 작은 나라들의 활동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기원전 1000년기 전반의 오리엔트사의 흐름은 오리엔트 세계의 통일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며, 이 과업에 먼저 성공한 나라는 아시리아였다.
아시리아는 장기간 메소포타미아의 주된 세력 밖에서 그 영향을 받으며 미미한 존재를 계속하다가 기원전 2000년기 후반 미탄니가 히타이트의 압력으로 쇠퇴하여, 이때 미탄니의 지배를 벗어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기원전 12세기 말경에는 북으로는 흑해, 서쪽으로는 지중해 연안에까지 이르렀다.
아시리아는 이러한 정복과 팽창과정에서 잔인한 군국주의의 성격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또한 기원전 1000년기 초까지 비교적 잠잠하였던 아시리아는 재빨리 제철기술을 배워 철제무기로 무장한 강력한 군대와 전차를 갖고 오리엔트의 통일을 위한 정복전쟁에 나셨다. 그리하여 기원전 8세기 말경에는 드디어 오리엔트 전체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수도를 니네베로 옮겼다.
기원전 7세기 말 아시리아 제국은 이란고원의 메디아와 바빌론의 칼데아 왕조의 연합공격으로 붕괴되었다. 그 후 이집트와 리디아를 포함한 4국이 정립하는 형세를 이루었으나 주도권을 잡은 것은 칼데아왕조의 신바빌로니아 왕국이었다. 이 때 신바빌로니아왕국의 수도 바빌론은 오리엔트에서 제일가는 국제적 대도시가 되었다. 헤브라이인의 이른바 '바빌론유수'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란고원에 위치하여 메디아에 신종하고 있던 인도-유럽어족의 페르시아의 키루스는 메디아왕위를 빼앗고, 리디아를 정복한 후 바빌론을 점령하였다. 다음 캄비세스때 이집트를 정복하고 다리우스 1세때 그 영토를 더욱 확장하여 오리엔트 전체를 완전히 통합하는 대제국을 확립하였다.
오리엔트 사회와 문화의 한계
로마인이 '빛은 동방으로부터'라고 말한 것처럼 오리엔트는 지구상에서 가장 빨리 문자를 가진 문명단계로 발전하고, 기원전 3000년기에 짜임새 있는 사회와 전제국가, 그리고 다양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렇게 틀이 잡힌 오리엔트의 사회와 정치, 그리고 문화는 지엽적인 면에서 약간의 변화나 일시적인 발전은 있었으나, 기본적인 구조나 성격에 있어서는 그대로 계승되고 지속되었다. 기원전 1000년기에 값비싼 청동기 대신 철기가 널리 사용되고, 이에 따른 생산력의 증대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기본구조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것은 잉여생산이 주로 전쟁과 궁정의 사치스러운 생활, 신전건축이나 특권계급의 낭비 등 비생산적 부문에 소비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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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07.19
  • 저작시기20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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