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원효사상의 현대적 조명] ` 원효 `와 ` 정토사상 `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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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원효사상의 현대적조명

I.원효 연구의 시발점

II. 원효 사상의 구심점
1.원효와 자장
2.원효의 파계
3.본원진실의 세계--정토

III. 원효의 정토사상
1.정토의 사상적 의의
2.정토의 본질

==========

원효대사의 사상을 현대적으로 재조명하였습니다.
정토사상에 대하여도 정말 자세히 나타내었습니다.
정말 많은 도움이 될거 같은 자료 입니다.

추천합니다. 꼭 좋은 성과 있으시길 빕니다. *^^*

본문내용

러한 불국토를 중국에서는 나집이후 '정토'란 용어로 표현하였고, 신라에서도 또한 주로 '정토'라는 용어를 불국토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대승불교에 있어서는 현재타방불의 존재를 인정하며, '정불국토'가 공간적으로 많이 존재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물론 <유마경>에서 ㅁ라하는 그 유명한 '심정토정설'을 무시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불국품>에 "만약 보살이 정토를 얻으려거든 그 마음을 맑게 하라. 그 마음이 말게 됨에 따라 불토도 맑게 된다."라고 되어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을 사상적으로 고찰하여 해석하여 볼 때, 정토를 무형적인 것으로 정의하려는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으며, '마음을 맑게 하면 바로 그곳이 정불국토'라는 의미로 집약시킬 수 있다. 이것은 앞서 말한 '정토의 두 가지 의미'가운데의 두번째인 '국토를 청정하게 한다'는 쪽의 해석인데, <유마경>에서는 곧이어 사리불과 나계범왕의 문답이 나오고, 나계범왕이 "석가모니불국토의 청정함이 마치 자재천궁과 같다"고 하자, 석존은 그것을 실증하여 보였다. 이것은 정불국토가 유형적인 것으로 묘사된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정토는 '심정토정설'에서와 같이 그 마음을 위주로 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으로 수용될 수도 있으나, 결국은 중생에게 전달되기 위해서 유형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 묘사되지 않으며 안되었고, 정불국토사상은 유형적인 정토를 상정하는 사상일 가밖에 없다. 이것은, 대승불교사상의 근간이 현재타방불사상에 있으며, 그 교리적인 근거가 타방불국토라는 공간적인 차원에서 논의되는 한, 당연한 귀결이 아닐 수 없다.
불국토를 공간적으로 설정한다는 것은 이미 유형적인 세계의 묘사를 의미하며, 그러한 세계를 정화한다는 것도 유형적인 것으로 수용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세 정불국토의 사상은 유형적인 정토를 상정하는 사상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필연적인 요청이 형성되는 것이다.
극락정토의 개념은 이러한 정불국토사상을 배경으로 해서 성립하였다. 그리고 극락정토는 모든 대승불교의 정토관의 전형으로 되었다.
위와 같은 유형적이고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으로 인하여, 대승불교의 정불국토사상은 누구나 가까이 할 수 있고, 파악하기 쉬운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으며, 종교적인 실천대상으로서도 피부에 와 닿을 수 있게 되었다.
2.정토의 본질
원효가 추구했던 정토는 본원진실의 세계인 '극락'이다. '정토사상', '정토신앙'이라는 말은 이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된다. 왕생의 근거는 아미타불의 48원에 있다. 중생의 입장에서 정토신앙이 성립하기 위하여는 '본원'이 있어야 하고, '아미타불'이 있어야 하고 '극락'이 있어야 한다. 극락은 <아미타경>에서의 아름다룽ㄴ 묘사로 꾸며지는 장엄이 갖추어져 있으며, 아미타불의 무진법문이 펼쳐져야 하며, 그 모든 근거는 '본원'에 있다.
정토의 본질을 명확히 파악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정토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면 왕생 그 자체가 근거를 상실하게 되어버린다. 그래서 정토를 다시 살펴보면 왕생 그 자체가 근거를 상실하게 되어버린다. 그래서 정토를 다시 살펴보면, 정토는 예토가 아니다 라고 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데에 이르게 된다. 그야 당연히 정토는 예토가 아니다. 그런데 정토를 관념화할 때 흔히 저지르는 오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토는 예토와 같이 생사의 세계가 아니다. 따라서 정토에 태너난다고 하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정토가 진실로 정토이기 위하여는 생사를 초월해야 한다. 그러면서 정토왕생을 거론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따라서 왕생은 '무생'이며, '무생의 생'이 왕생이다. 여기에는 중생의 분별지에서 말하는 '태어난다'라는 개념은 일체 부정된다.
원효는 정토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위와 같이 네 가지로 분류해서 정토를 말하였으나, 정토란 모두가 여래의 원과 행이 이루는 바이며, 저 정토에 생하는 자의 자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토 등의 기세계가 오직 중생의 공업만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같지 아니하다. 이런 까닭으로 통칭하여 청정토라고 이름하는 것이다.(<무량수경종요>).
자력을 부정하고 여래의 원과 행을 부각시키고 있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원효는 다시 왕생에 대하여 정의를 내린다.
무릇 왕생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힘으로 아미타불을 감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극락을 감득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여래의 본원력의 능동적인 묘용으로 인하여 비로소 수감수용(왕생하고 성불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결코 중생의 자업인력으로 성취되어지는 것이 아니다.(<무량수경종요>)
본원이란, 부처님에 의해서 자각도니 자비와 지혜가 바탕이 된 여래의 대비심이 아미타불의 본원이란 구체적인 모양을 갖추고 표현된 것이다. 그것이 지금 이 자리에 뚜렷이 나타남을 원효는 보았던 것이다. 자력의 한계를 인식하고 범부·중생으로서의 자각은 절망을 초래하였으며, 절망할 수밖에 없는 원효에게 다가선 것이 바로 여래의 대비원력이었던 것이다.
정토란 아미타불의 본원에 의해서 성립된 구과이다. 본원은 여래의 대비심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죽음을 통해서 정토를 얻고자 하지는 않는다. 여래도 정토왕생을 위해서 죽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아미타불의 본원은 생사의 업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사의 가운데에 안주의 처소를 제공하려는 대비심의 발로이다.
차생이 고해라 하더라도 차생을 버리고 내생에 가고 싶다고 하는 인간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나의 모든 것을 의탁해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단 한마디의 말씀과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은 종교적 가치관의 획득이다. 고해의 차생에서 확신할 수 있는 한마디의 말씀, 그것은 '부처님, 고맙습니다.'라고 하는 말이다.
여래의 대비원력을 믿고 의지하여 환희심을 낼 수 있다면, 그것은 모든 가치기준이 퇴락하여 버린 현대의 '나'에게 확신할 수 있는 가치관이 제공되어지는 것이다. 단 한마디, '부처님 고맙습니다'라고 하는 말은 '나무아미타불'이며, 염불왕생이 기약된 사람만이 자신있게 뛰어들 수 있는 신행의 세계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원효가 획득한 안심이며 평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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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09.02
  • 저작시기2003.0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4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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