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초 독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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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는 말

2. 18세기 말, 19세기 초의 주변 형세
ㄱ. 프랑스 혁명
ㄴ. 나폴레옹의 등장과 유럽전쟁

3. 시민사회로의 개혁 움직임과 기존체제와의 갈등
ㄱ. 프랑스혁명 이후 독일의 개혁
ㄴ. 빈체제하의 독일
ㄷ. 7월혁명의 영향과 독일의 3월혁명

4. 독일 혁명의 특징과 한계

본문내용

스럽게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사회적 성장을 이룩하는데, 이러한 현상은 1840년대 이르러 반동적 정부에 대한 저항세력에 자본가들을 편입시켰고 혁명운동에 더욱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여기에 산업의 발달로 인해 창출된 수많은 노동자들 역시 사회주의사상의 영향을 받아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프랑스의 2월혁명(1848)은 독일 내 자유주의 운동에 중요한 도화선 역할을 했다. 1846, 47년에 걸쳐 발생한 흉작은 전반적인 경제적 위기를 몰고 와 '감자혁명'이라는 이름의 농민 봉기가 독일 각 지역에서 일어났고 프랑스에서는 선거권 확대 요구 시위가 정부에 의해 저지당하자 파리의 소시민층이 들고 일어나 시청을 점령하고 루이 필립을 왕위에서 쫓아내어 민주 공화국을 수립한다.
이에 자극받은 독일 민중들과 시민들은 3월에 베를린과 빈에서 혁명을 일으킨다. (3월혁명 Marzrevolution) 베를린에서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1840∼1861)가 3월 18일 출판의 자유를 허용하고 새로운 헌법 수립을 약속하였다. 시민군과 대치중인 군을 철수시키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오히려 군중들에 대한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하자 군중들은 바리케이트를 구축, 시가전이 전개하여 국왕을 굴복,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 그러나 새로운 내각 역시 민중을 대변하는 성격을 띠지 못했다. 830명의 대표 중에 농민은 1명, 노동자는 한 명도 없었다. (민석홍 著《서양사개론》(1997, 삼영사) p.443)
.
한편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도 혁명이 폭발하여 메테르니히를 추방시켰고 7월에 제헌의회를 소집, 9월에 개혁안을 마련하여 농민의 부역의무를 폐지하였다. 이에 힘을 얻은 오스트리아 내 여러 민족들이 독립을 요구,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를 붕괴 직전까지 몰고간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내에서의 독립투쟁은 오스트리아와 폴란드이 독립을 우려한 러시아의 군사적 개입으로 사실상 실패로 끝이 난다.
3월혁명은 반동적인 봉건관료주의의 잔재를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았다. 반동세력의 정치적 권력은 이제 부르주아지에게 분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관리들은 여전히 권력을 놓지 않고 있었고 군부 역시 그들의 손아귀에 장악되어 있었으며, 중요한 것은 여전히 민중에게는 혁명의 결과를 향유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언론의 자유나 집회 및 결사의 자유, 보통선거제, 대표제, 시민군사제등이 바로 이 혁명을 통해 민중들이 부르지아지들이 손에 쥐어준 결과물들이었다.
) 발터 슈미트外 著, 강대석 驛《독일근대사》(1996, 한길사) p. 484, 485 참조)
그러나 문제는 독일연방의 통일문제였다. 혁명 이후 소집된 국민의회는 대독일파(Kleindeutsch) 와 소독일파(Gro deutsch)로 분리되어 대립하였다.
) 대독일파는 오스트리아의 독일계 주민을 포함한 통일을 주장한 반면 소독일파는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 프로이센 국왕을 세습적 왕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대독일파는 연방국가를 소독일파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표방하였다.
결국 소독일파가 우세하여 프로이센 왕을 황제로 삼기 위한 절차를 진행하는 도중에 프로이센 국왕의 거절로 독일의 통일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버리고 만다. 국왕은 혁명을 통한 황제등극이 자신의 권리와 명예를 더럽힌다고 여겼던 것이다.
) 이민호 著《독일사》(1996. 대한교과서주식회사) p.127 참조
4. 독일 혁명의 특징과 한계
독일의 시민사회 형성과정을 한 마디로 압축해서 표현하자면 '반동세력과 혁명세력의 기나긴 줄다리기'라 할 수 있겠다. 독일의 혁명이 주변 강대국인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오랜 시간동안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두 국가들만큼 성공적인 결과를 획득하지 못한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첫째는 독일은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이 애초에 통일되어 있는 국가가 아닌 연방국들의 느슨한 연합체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혁명에 있어서도 민중들의 단합된 역량을 발휘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민중들의 봉기가 이곳 저곳에서 산발적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정부의 입장에서 진압하기가 휠씬 수월했던 것이다.
둘째는 위로부터의 개혁의 한계점이다. 이는 프랑스혁명과 잘 대별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독일의 반동세력들은 민중과 시민들의 혁명에 대한 존중감이 결여되어 있었고, 단순히 그들의 과격 행동을 일시적으로 진정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민주적인 제도들을 수용하는 척 했을 뿐이지 혁명세력들의 소요가 진정되면 다시금 원래의 봉건적 틀속으로 복귀하려는 태도를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독일의 혁명세력들은 3월혁명과 같은 성공적인 혁명 이후에도 여전히 그들을 철저히 타도하지 않았고 여전히 그들의 정책입안의 지위를 유지시켜 주었다. 이는 프랑스의 부르주아지들이 혁명 후 기존의 왕과 귀족들을 권력의 언저리로부터 철저히 몰아내고 그들의 사상에 입각해서 개혁을 추진했다는 점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셋째는 러시아와 같은 반동보수국가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러시아는 그들의 보수적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독일 연방국에서 벌어지는 독립운동을 비롯한 혁명운동에 개입할 필요가 있었고, 이는 독일 왕실이나 보수귀족계층의 이해관계와도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다.
3월혁명을 비롯해서 독일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혁명의 움직임들은 실패로 끝이 났다. 자유주의에 양보했던 독일연방국들의 군주들은 시민들의 요구를 철회 내지 축소했고, 1850년에 제정된 프로이센 헌법은 부르주아지나 귀족의 지배와 종전의 전제정치를 재확인시키는 도구로 통일 이후 1918년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반세기동안의 자유주의를 향한 혁명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고 결국 독일 자유 민주주의의 역사도 그것을 따라 흘러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참고문헌
발터슈미트外 著, 강대석 譯『독일근대사』(1996, 한길사)
민석홍 著『서양사개론』(1997, 삼영사)
이민호 著『독일사』(1996, 대한교과서주식회사)
오토 단 著 오인석 옮김『독일 국민과 민족주의의 역사』(1996. 도서출판 한울)
김경창 著『서양외교사』(1985, 대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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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1.18
  • 저작시기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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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3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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