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사의 새로운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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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들어가기

2. 펼 치 기

본문내용

있다. 여기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로 對日關係에 있어서의 問題點이다. 본래 개화사상이 당시의 朝鮮現實을 파악하는 기준은 西洋내지 日本의 資本主義秩序였다. 그것은 開化思想과 衛政斥邪思想 및 東學思想의 특질적 비교에서도 잘 나타난다. 衛政斥邪思想이나 東學思想은 질적 차이는 있으나 다 같이 列强에 대하여 위기감을 느끼고 帝國主義에 대하여 격렬하게 저항하였으나 여기에 비해 開化思想은 서구적 가치관을 인정하고 그 器를 수용하려는 思想이었으므로 자연히 열강들에게 소극적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두번째로는 近代的 改革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과제인 地主佃戶制의 타파는 등한시하였다는 점이다. 封建體制의 핵심인 地主佃戶制는 溫在한 채 상부구조로서의 권력구조와 하부구조로서의 流通秩序의 近代化만으로 資本主義化를 기도하였다는 것은 開化派의 身分的 性格에 말미암은 것이다. 市民階級의 미성숙으로 말미암아 일부 先進관료층과 先進的 知識人層이 開化運動의 주체로 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들의 신분적 성격은 봉건지주였던 것이다. 이러한 한계가 결국 운동의 방향을 自己中心的이며 관념적인 쪽으로 이끌어 간 것이었다.
세번째의 한계는 그들의 政治수준이 역시 封建的인 忠君思想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開化思想속에 民權伸長을 위하여 君權의 制約같은 것이 다소 있는 것 같지만 크게 보아 기조 테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國王에 대한 忠識을 한갖 政治的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진심으로 숭배하고 國王이라는 존재가치를 인정함으로써 王을 中心으로 하는 中央集權的 君主制의 신봉자 노릇을 한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近代的思想이 일부 上層elite들에게만의 思想으로만 그치게 되어 일반 民衆들에까지 침투시키지 못하였던 점이다. 그리하여 민중들은 왜 開化가 火急한 것인지 왜 近代的 改革運動을 단행하여 富國强兵을 이룩하지 않으면 안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무릇 모든 思想이나 政策은 民衆化가 절실하다고 보겠다.
각각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壬午軍亂은 폭동 군인들의 사상의 미숙함과 大院君에 대한 그릇된 기대, 淸의 침략성을 깨닫지 못한 대원군의 미흡한 정세 파악, 침략자에 의존하는 민씨 일당의 반민족성, 청과 일본의 침략 책동 등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甲申政變이 실패로 돌아간 원인을 살펴보자면, 開化派의 개혁 구상에는 농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토지 제도를 개혁한다든가 하는 당시의 본질적인 문제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며, 봉건 사회의 기본 틀인 地主制와 專制君主制는 그대로 둔 채 근대적 경제 체제를 수립하고 정치 제도를 개혁하려고 한 것이다. 즉, 民衆을 정치적 지지 기반으로 끌어들이지 못한 채, 국왕을 이용하려 하였고 일본 침략세력을 지나치게 믿었으며 청국 군대의 무력을 과소평가하였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東學農民運動은, 농민군이 封建體制를 전면 부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봉건 권력의 정점인 조선 왕조를 打倒하는데까지 이르지 못하였다. 따라서 정부측과 타협할 수 밖에 없었고, 또한 농민군은 빈농. 부농. 몰락 양반. 胥吏層. 상인 등 利害關係를 달리하는 다양한 층으로 이루어져 조직적이고 통일적인 모습을 갖출 수 없어서 전쟁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甲午改革은 자신들의 개혁 구상을 法令으로 발표하고 개혁을 서둘렀지만 민중의 이해와 요구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개혁을 수행하려는 방안이라고 하면서 일본에게 갖가지 利權을 넘겨주었다. 따라서 당시 반봉건 반침략의 과제를 수행하던 참된 變革의 주체인 민중을 일본군의 힘을 빌려 壓殺하였기 때문에,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霧散된 것이었다.
獨立協會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萬民共同會에 참가한 민중이 하원 설치를 주장한데 대해 독립 협회는, 민중은 無識하고 어리석어 啓蒙의 대상이기 때문에 자신들만이 참여하는 상원의 설치만을 요구하였다. 또한 독립 협회는 지주의 입장에서 모든 개혁을 추진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사회를 변혁하려는 농민들의 투쟁을 외세의 힘을 빌려서라도 탄압하려 하였다. 결국 독립 협회는 개혁 추진에 필요한 민중의 지지를 얻을 수 없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3. 아우르기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면서 자신의 약점을 반성할 때 비로소 성장한다고 한다. 과거를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으며 현재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이 반성할 줄 안다고 하였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발전하는 시대에는 반드시 옛것을 숭상하며 현재를 고쳐나가는 온고지신, 법고창생을 추구하며 벌전 시켜왔다. 첨단 문물이 난무하는 지금 21세기에 이르러 우리는 너무 서양적 가치관에 기준을 두어 서양과 비슷하게 사는 것을 발전이라 하고 다른 모습으로 사는 것을 후진이라 생각한다. 물론 19세기 20세기를 거치면서 서양이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시대이기에 그러한 관점도 이해는 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러한 미래를 우리 손으로 펴 나갈 수는 없다.
지금의 과제는 눈앞에 펼쳐진 21세기를 바라보며 20세기를 정리하는 것이다. 20세기가 인류 역사상 공리주의의 대 발전기리면 21세기는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고 도덕을 키우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20세기를 정리한다는 것은 민족 분단의 정리의 의미도 지닐 것이다. 민족의 재 통일은 우리의 인간존엄성 회복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문제이다. 어두운 19세기와 20세기를 걸어온 우리인 만큼 민족의 뒤안길에 대해 재 조명 해보고 비판하면서 당당한 21세기를 펼쳐 나가야 할 것이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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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白鍾基, 『韓國近代史硏究』, (서울 : 傳英社,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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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千寬宇, 『韓國의 開化思想』, (서울 : 三省出版社, 1978)
7. 崔永浩, 『甲申政變論』, 李基白 編, 『韓國史 市民講座』, 제7집, (서울 : 一潮閣, 1990)
8. 李昞林, 「개화사상의 형성에 관한 연구」, (博士學位論文, 東亞大學校 大學院,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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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4.10
  • 저작시기20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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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46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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