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전통 정원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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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중일 전통 정원 비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중국의 정원
1) 원림
2) 중국 원림을 만드는 과정에 작용하는
이념의 개념
(1) 예 사상

(2) 도 사상
(3) 자연관
3) 정원의 유형
4)중국 전통 원림의 역사

2.일본의 정원
1) 정원의 개념
2) 일본 정원을 만드는 과정에 작용하는
이념

(1) 애니니즘
(2) 불교사상
(3) 신선사상
3) 정원의 유형

4) 일본 정원의 역사
(1) 고대 정원

(2) 신덴-즈쿠리형식의 정원
(3) 조우도형식의 정원
(4) 선종의 정원

(5) 다도 정원
(6) '카이유(回遊)'형식의 정원
3. 우리나라
1) 정원의 어원
2)한국 정원을 만드는 과정에 작용하는
이념
(1) 자연숭배사상
(2) 신선사상
(3) 정토사상
(4) 유교사상
(5) 음양오행설

(6) 풍수지리설
(7) 노장사상(老莊思想)
3) 한국정원의 유형

4) 한국전통정원의 구성요소
(1)지세와 지반
(2)花木

(3) 괴석(怪石)
(4) 건축물
(5) 水, 泉, 池塘

(6) 담장
(7) 화계(花階)
(8) 석조물(石造物)
4. 한·중·일 정원의 비교
1) 공간구성

2) 시각구성

3) 조경요소의 활용기법
(1)수목

(2)물
(3)암석

4) 건축적 요소

5) 유상곡수 문화

본문내용

조선시대 학자 번채는 15세기 초 성균관 앞 냇물에서 계욕을 했다고 읊고 있다.
중국, 일본, 우리나라의 계욕풍속사를 더듬어 볼 때 포석정에서도 음력 3월 3일 계욕의례와 더불어 유상곡수연이 행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본다면 포석정에서는 계욕을 위한 장소가 있어야 한다.
포석정에서 계곡을 따라 60m쯤 경주 남산쪽으로 올가가다 보면 봉우리같이 생긴 바위아래 웅덩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웅덩이는 크기가 동서 140cm, 남북 110cm, 깊이 60cm로 크기와 형상은 멱감기에 딱 알맞을 정도다. 웅덩이 위치 또한 포석정의 동쪽이기 때문에 동쪽에서 흐르는 물로 몸을 씻었다는 고대 중국의 기록과도 부합된다. 이로 미루어 이 웅덩이는 포석정에서 유상곡수연을 하기 전 계욕을 위한 목욕장소로 추정된다. 음력 3월3일에 계욕을 한 후 유상곡수연을 펼친 포석정에는 정자가 들어가 있는 그 이름을 보면 반드시 정자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중국에 남아 있는 유배정을 보면 모두 정자속에 곡수로가 설치되어 있다. 이런 예로 볼 때 포석정의 곡수로가 정자 형식의 건물에 뒤덮여 있었을 것이다.
포석정은 신라 패망의 상징적인 장소로 버림받아 신라왕국의 멸망이후에는 그 원형을 잃어 버렸다. 조선고적도보에 나와 있는 일제초기의 포석정 모습을 봐도 군데군데 훼손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포석정의 곡수로는 급수와 배수장치가 유실되어 그 기능이 정지된 상태다. 중국의 곡선은 정형적이고 대칭적이며 수로의 폭이 좁고 깊이도 균일하다. 따라서 물이 흐르거나 잔이 흘러가면 다 예측할 수가 있는 흐름이다. 그러나 포석정은 여러군데 과감하게 불규칙성을 도용했고, 또 수로의 폭이 커서 잔의 형상, 무게, 물의 흐름의 정도에 따라서 결과는 민감하니 달라진다. 흐름에 대하여 불예측성을 갖는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 시를 짓고 벌주 석잔을 들고 연회를 즐기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불예측성이 흥미있는 요소가 되지 않을까 싶다. 매우 우수한 설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잘못된 포석정 역사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는 유상곡수문화가 단절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웃나라에서는 유상곡수문화가 고상한 전통문화유산으로 전승되고 있다. 이제 포석정은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6)전통정원의 주체
▷ 중국
졸정원(拙政園)을 예로 들어 보자. 졸정원은 그 규모나 장식적인 면에서만 중국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 그 명성은 당대 강남문화의 중심지였던 소주(蘇州)지역의 쟁쟁한 문인과 예술인들이 이 원림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는 데서 연유한다. 이 정원은 명말 중국 문화와 예술의 거장 문징명(文徵明)을 비롯한 수많은 사대부 문인화가들의 문화활동의 장이었고, 졸정원은 그들의 시와 그림 속에 생생히 재현되었다. 특히 중국 원림과 회화와의 관련성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졸정원과 함께 유명한 소주의 원림 사자림(獅子林)은 원대 4대 화가 중 한 명인 예찬(倪瓚, 1301~1374)의 활동공간이기도 했는데, 명말 청초에 활동한 중국 조원가들은 거의 화가로서의 재능을 겸비한 인물들이었다. 기실 중국 회화의 준법과 포치(布置)란 산수의 경관을 그대로 묘사하기보다 그 속에 담겨 있는 뜻과 본질을 2차원의 화면에 담아 내려는 노력이었으며, 원림은 그것을 3차원의 공간에 구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우세했다. 이렇듯 중국 원림은 화론(畵論)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회화의 심미의식과 많은 공통분모를 갖는다.
▷ 일본
일본의 경우, 유명한 정원은 대개 -사(寺), -원(院)의 이름을 갖고 있다. 대단히 불교적인 일본 정원인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들어가 보면 당시의 불교는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헤이안 시대 침전식 정원은 당시 일본 귀족정치와 불교문화의 중심에 있었던 후지와라(藤原) 가문의 주택으로 대표되고, 이 정원에는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라는 10세기 일본 최고의 문학작품이 자리잡고 있다. 헤이안 시대의 귀족적 불교는 가마쿠라(鎌倉)와 무로마치(室町) 무사들의 시대를 거치면서 선불교의 성행으로 이어졌고, 이것은 고산수 정원이라는 독특한 정원을 등장시켰다. 금각사(金閣寺)와 은각사(銀閣寺)로 유명한 이 시대 정원의 후면에는 일본의 최고권력 아시카가(足利) 가문이 자리잡고 있다.이후 모모야마(桃山)와 에도(江戶) 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은 다정(茶亭)식 정원이란 새로운 양식을 드러내는데, 그 이면에는 다도의 승려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의 사상은 정원의 조영에도 영향을 주어 같은 다정식 정원이라도 모습이 확연히 구별된다. 결론적으로 일본의 정원은 대부분 사찰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 다분히 불교적인 정원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그 이면에는 정치적 코드가 숨어 있다. 종교적인, 그러나 지극히 정치적인 정원인 것이다.
▷ 한국의 정원
한국 정원은 두 나라에 비해 규모의 화려함이나 복잡한 코드는 드러내지 않는다. 그 대신 시적인 정취가 담겨 있다. 소쇄원과 보길도 정원을 조선시대의 대표적 정원으로 꼽는 것은 그 이면에 한국의 선비를 대표하는 송시열과 고경명, 김인후와 윤선도가 있기 때문이고, 그들의 글과 그림이 있기에 더욱 빛을 발한다. 많은 누정 정원에는 관련되는 기문(記文)이 있고, 곡과 경 같은 시적인 흥취가 있으며, 선비들의 시가 있다. 한국 정원은 이들을 통하여 더욱더 완전한 모습을 갖는다. 그러므로 한국의 정원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시정(詩情)인 것이다.
<< 종합 >>
●한국
두드러진 특성이 있기보다는 자연 그대로 내버려두는 경우가 많고 자연을 빌려기도 했다.
●중국
대자연의 모방과 축소, 풍요로운 변화감, 시각적 포만감을 주었다.
●일본
자연에 대한 엄격한 조절과 통제에 따른 철학적 정원이 주를 이뤘으며, 자연의 상징화로 생각했다.
중 국
건축물에 둘러싸인 새로운 공간 속에 회화풍의 경관을 창조
명랑(明郞)한 분위기
한 국
주변경관을 차경(借景)하면서도 직선위주의 정형적인 공간처리로 상징성 있는 경관을 연출.
수심양유(水心養惟)의 도장
일 본
둘러싸인 공간 속에 깊은 숲속의 그윽한 분위기 연출. 상록수 위주의 임천(林泉)정원
선승(禪僧)의 암자 같은 분위기
한국의
정원 - 비원 중국의 정원 - 유원
일본의 정원 - 계리궁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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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2페이지
  • 등록일2004.07.02
  • 저작시기2004.0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9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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