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파극의 수용과 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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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게 뒤얽힌 가정비극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민족적 정서를 도리어 퇴폐적이고 소극적 감정에 젖게 하여 민족적 의기를 꺾는데 일조 했다고 볼 수 있다. 셋째로 <雨中行人>
<은세계> 등과 같은 친일적인 작품을 상연하여 민족정기를 오도했고, 비예술적이고 불건전한 신파극이 범람하고 동시에 깊이 뿌리 박혀 내려와서 정통적인 근대극 발전을 저해하였다. 연극의 내용은 민족 현실마저 외면한 채 극히 상업적이고 통속적으로 타락해 간 것이다.
이렇듯 신파극이 상업적, 통속적으로 타락해 간 이유도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신파 선구자들(흥행주, 배우, 연출자)의 대부분이 고등 교육을 받지 못해 무식해서 예술에 대한 이해나 사명감이 없었던 것은 물론 결여된 역사 의식을 지적할 수 있다. 둘째로 일본의 신파극이 들어올 때 일본에서도 2,3류에 속하는 지방의 無名巡業劇團이 이식해 주었고, 우리 나라 연극인들 역시 아무런 기준이나 가치평가 없이 맹목적이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는 것이다. 셋째 당 사회는 功利主義的 연극관이 지배하고 있었고 대중의 예술에 대한 인식부족, 즉 대중의 수준이 낮았던 것이다. 넷째 연극인들이 경영상의 불합리 등으로 경제적인 고통을 심하게 겪어서 자연 관객에 영합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다섯째로 위대한 신파인 즉 시대상황을 정확히 그려낼 수 잇는 신파작가라든가 연극 지도자가 나오지 않았었다는 것이다.
ⅴ. 신파극에 대한 대중의 반응
신파극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대중의 반응은 퍽 냉담하였다. 연극 내용이나 주제, 정서 등이 일본인에 맞추어서 형성된 것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한국식으로 고쳤더라도 한국 관객에게는 생경했던 것이다.
연극쟝이라 하다 것은 경셩시다ㅣ의 방탕한 남짜와 녀짜의 시합소를 지을뿐이라더니 요행 신파 연극이 나셔 져이 까ㅣ량한 것이 잇스나 연극을 보는 사링은 이왕의 폐풍을 곳치지 못하고 연극쟝으로써 한 헌화쟝을 지어 혹은 이러서고 혹은 안즈며, 혹은 다른 사링과 의론이 분분하고 혹은 고담쥰론으로 우스며 리약이 하니.. (每日申報, 1931,1,21)
당시 대중의 신파극에 대한 반응은, 가정비극류의 신파극이 성할 때인데도 극장 안이 숙연하기는커녕 떠들썩하고 웃음이 넘쳐 있었다는 것은 관객의 교양도 문제되겠지만 미숙한 연극내용에 별로 공감하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면이기도 하다. 가정비극에 대한 관객의 냉담으로 극계 일부에서는 신파극을 희극으로 만들어 보려는 의도까지 있었던 것 같다. 이 후 한국적 가정비극류의 신소설의 전파와 신문의 선동, 연극 내용의 한국화 등으로 관객은 차차 홍루적인 가정비극물에 빠져들어 가게 되었다. 체루적 비극에 관객이 동화되어 가기 시작한 것은 신파극이 들어오고서도 수년이 흐른 1910년대 중반부터였다. 일제에 의한 봉건체제의 연장과 망국의 이중의 恨으로 이루어진 것, 즉 시대성과 한국 민족성의 여성적표현인 恨的 정서, 그리고 신파극이 갖고 있는 감상성이 조화를 이루어 대중을 울렸던 것이다. 한국인의 정적 정서, 즉 한국예술의 원형에 대해 조지훈은 "힘, 꿈, 멋, 슬픔"으로 보고 비극적인 면을 강조했다.
봉건사회의 포화에서 일어나는 도시문화와 귀족문화의 타락은 곳 그대로 통제없는 解蛇의 예술,보람없는 低徊의 예술을 낳지 않을 수 없었으니 封建諸侯의 배반과 혼란의 질곡에 대한 불평과 원망 등, 이 모든 사회 현상이 슬픔의 예술을 키워온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兵亂과 착취 속에 허덕이는 민중의 절망은 無常觀 속에서 허무주의적 색채로 물들게 되었으니 슬픔의 예술이 淨土思想과 禪思想에 연결되는 것도 당연한 추세라 할 것이다. 통일신라 후반기에서 고려의 오백년을 흘러내린 哀憐惻惻한 슬픔을 보라.
불행한 역사의 도정을 밟아온 것으로 인하여 감상성이 짙었던 한민족이 일본이라는 외민족에게 완전히 짓밟혀서 절망과 좌절감속에 빠져있을 때 그들은 비극은 아니지만 비극에 가깝고, 슬프지만 행복하게 끝맺음하는 신파극을 만나게 된다. 봉건적인 의리와 인정, 눈물을 자극했던 초기 신파극은 슬픔과 절망이 심화되어 가던 1910년대 민중에게 점화되어 서서히 대중의 정서 속에 뿌리내려 가게 된 것이다.
*참고 문헌
신근재, 「〈금색야차〉와 〈장한몽〉에 반영된 사회의식」, 일조각, 1995, pp.56~64.
서연호, 「한국근대희곡사」, 고려대학교출판부, 1996.
양승국, 「한국현대희곡론」, 연극과 인간, 2001.
유민영, 「한국현대희곡사」, 새미, 1997.
「한국근대연극사」, 단국대학교출판부,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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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7.16
  • 저작시기2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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