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항일유적 답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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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사(구 미국문화원)
[백산기념관]
민주공원
부산민주항쟁기념관
광복 기념관
임시수도 기념관
박재혁과 부산진경찰서폭파사건
동래고등학교 동고관

본문내용

는 사사오입 개헌을 통과시켰으며 1960년에는 3.15정. 부통령선거에서 대대적 인 부정이 감행되어 자멸의 길로 나아갔다.
이와 같이 장기집권을 위해 여러 차례 불법개헌과 야당에게 강압정치를 하여 민주정치 발전에 지장 을 주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융통성없는 강경책으로 일관했다. 결국 4.19를 초래하여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하와이로 망명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 외의 자료들
박재혁과 부산진경찰서폭파사건
부산시 동구 범일동에서 1895년에 태어났다.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전기회사의 전차종업원이 되었다가 경부선 관역전의 어떤 무역상인의 점원으로 일을 보았다. 1917년 6월 주인에게 7백여원을 얻어 상해에 가서 무역업을 하다가 1918년 6월에 귀국하였다. 그는 상업학교 동창인 동지 최천택에게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투쟁할 것을 다짐하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재차 상해로 가서 중국 각지와 싱가포르 등지서 무역업을 하는 등 독립 투사들과 사귀었다. 1920년 7월에 의열단장 김원봉이 의열단에 입단하여 독립투쟁에 적극 나서기를 권유하였으나, 가정형편상 주저하다가 8월 김원봉이 재차 부르니 상해로 갔다.
의사는 김원봉으로부터 군자금 3백원을 받아 수많은 애국동지들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부산경찰서를 폭파하기로 하고, 동년 9월 상순에 중국고서로 짐을 꾸리고 그 밑바닥에 폭탄을 감추어 상해를 떠나 일본 장기(長崎)를 거쳐 9월 13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부산에서동지인 최천택을 만나서 하룻밤을 환담하고 용두산에서 기념촬영을 한후 노모를 생각하여망설이다가 큰 의(義)을 위해 의사는 나라를 위한 큰뜻을 이루기로 했다. 의사는 14일 하오 2시 부산경찰서로 가서 서장(橋本秀平)에게 면회를 청하니 전부터 안면이 있던 터라 면회가 허락되었다. 박의사는 2층 서장실에서 서장과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몇마디 인사와 환담을 나누다가 진기한 고서를 구경시켜 준다고 이책 저책을 꺼내 들고 보여주는 동안에 마침내 맨밑바닥에 감추었던 전단을 집어 서장앞으로 던지고 "나는 상해에서 왔다. 네가 우리 동포를 잡아 우리의 계획을 깨뜨린 까닭에 나는 오늘 너를 죽이는 것이다"라고 꾸짖고 폭탄을 들어 마주 앉았던 탁자 한가운데 메어다 붙였다. 굉장한 폭음과 함께 다같이 쓰러지니 서장은 오론쪽다리에 중상을 입고 혼절했으며 의사도 다리에 중상을 당하여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으나 우선 일경이 병원으로 보내서 응급치료를 받게한 후,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채 재판정에 끌어냈다. 부산지방법원에서 사형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1921년 3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고, 다시 상고하니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언도로 형이 확정 됐다. 대구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그는 그동안의 혹독한 고문과 폭탄 상처로 폐병까지 발병한지라 하도 고통이 심하므로 "왜놈의 손에서 욕보지 말고 차라리 내손으로 죽겠다"고 결심하고 단식하다가 형집행전인 1921년 5월 11일(27세)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최근에는 의사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사업회에서는 어린이대공원 내에 동상을 건립하여 의사의 뜻을 기리고 있다.
동래고등학교 동고관
이 땅에 개화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밀려들기 시작한 것은 1876년「강화도조약」이 체결되면서 부터이다. 당시 동래부에 속해 있엇던 부산은 항구를 낀 입지조건 때문에 개항과 더불어 개화의 바람을 일찍 맞게 되었다. 1898년 당시 동래부의 동래기영회에서는 구국의 신념에 따라 신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에 신명록(辛明錄)이란 분이 신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사재를 털어 한문과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원을 동래에 여니, 이것이 동래부학교였다. 이로부터 삼락학교를 거쳐 1907년에 교명을 동명학교로 개칭했다가, 1916년에 다시 사립 동래고등보통학교로 개명하였고, 1919년에는 동래고보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되찾겠다는 구국의 횃불을 드높여 부산지역 항일운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후 1922년에는 동래고등보통학교가 관립으로, 1925년에는 다시 공립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1938년 5년제 동래중학교로 되었다가 이후 중고로 분리되어 오늘날의 동래고등학교로 발전하여 구국의 교육이념을 불태우며 발전해 왔다. 구체적 활동들은 다음과 같다.
1919. 3. 13 동래고보 3.1운동 거사 1926. 2. 장산 촛불의거
1940. 11. 23 부산학생항일운동(소위 노다이 사건) 1944. 5. 1 순국당사건
1944. 8. 1 조선독립당사건 1967. 6. 8 부정선거 데모
동고관은 1899년 개교 당시부터 100년간의 사진자료, 중요문서, 교기와 교표, 항일 독립 운동 관련자료 등 학교의 오랜 역사에서 알수 있듯이 교직원학생들의 얼이 깃든 유물들을 모아 전시하여 100년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시설하였다.
동고관의 내부는 50여평의 제12전실로 나누어져 있으며, 제1전실에는 4개의 전시 진열장을 서치하여 항일독립운동 주동인물의 초상과 기록자료를 전시하였고, 제2전시실에는 학교 변천 및 교복교지 등의 자료와 각종대회의 우승기 및 우승컵을 전시하고 졸업생들의 각종 유품과 직인 등을 전시하였다. 이 역사관의 시설은 재학생들의 장으로서 활용하고, 대외적으로 공개하여 관람케 하고 있다.
또한 이 밖에도 동래고 출신 항일독립 투사들의 업적들이 소개되어 있으며, 그들의 주요 활동을 살펴보면 먼저 동래고보의 3.1운동, 장산촛불 사건, 봉안전 매화(오물) 사건, 부산운동장 학생운동, 순국당 및 조선청년 독립당 사건, 1925. 7. 10 전교생 맹휴, 1929. 7. 10 조선어 시간단축에 대한 맹휴, 1940년 11월 부산학생운동(소위 노다이 사건) 등을 들 수 있다. 이 외에도 항일투사들의 인물사진 24점(이 환김 갑곽상훈김인호엄진영김귀룡박문희추규영박영출엄병영이수열허웅정두열안장원배종훈이도윤문인갑남기명김일규김병현김한협배봉수박정오)이 있으며, 당시 동래지역 및 부산지역 학생 항일 운동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크고 작은 학생항일운동은 당시 부산을 중심으로 한 항일 투쟁의 바탕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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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5.31
  • 저작시기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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