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역사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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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참고 ※

<조선반도의 동향과 일본>

<조공>

<조공>

<야마토 조정의 자신감>

<쇼토쿠 태자의 외교>

<백촌강 전투>

<다이호 율령과 연호>

<일명 무역>

<동아시아와의 관계>

임나일본부설

임나일본부관련 기록과 역사의 왜곡(광개토 대왕릉비)

본문내용

북한의 박시형과 김석형의 연구 성과가 1966년에 나온다. 세 사람의 원문 판독 성과는 거의 비슷하지만 일본 관학자들의 해석과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먼저 신묘년 기사에 대한 해석이다.
- 일본 관학자들의 해석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제)과 신라를 쳐부숴 신민으로 삼았다.
而倭以辛卯年, 來渡海, 破百殘??新羅以爲臣民
- 정인보 등 한국 학자 해석
왜가 신묘년에 침입해 왔기 때문에 바다를 건너가서 쳐부쉈다. 백잔(제)이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 百殘??新羅以爲臣民
위 두 문장의 차이는 구두점 두 개의 위치가 다를 뿐이지만 번역문의 내용상 주어가 바뀌어 버린다. 구두점 하나가 이렇게 다른 뜻이 되어 버리는 데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결국 한문이란 어떻게 띄어쓰기를 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뜻이 바뀌는 것이다. 마치 띄어쓰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라고 잘못된 것을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로 바로잡는 것과 마찬가지다. 1970년대 이후에도 문정창.정두희 등이 위와 비슷한 견해를 내놓았는데, '고구려 태왕의 업적을 찬양하는 비문에 어떻게 우리나라가 일본의 신하가 된 사실을 기록했겠느냐'는 상황 논리도 강한 설득력을 발휘하였다.
태왕비에서 가장 문제되었던 것이 위의 신묘년 기사인데 이에 못지 않게 큰 물의를 일으켰던 것이 경자년 기사이다. 그러나 경자년 기사의 허구성은 간단히 드러났다. 1981년 중국 기관에서 정밀한 탁본을 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주운대탁본이다. 그런데 이 새로운 탁본에서 글자가 새롭게 판독되면서 전혀 새로운 해석이 나온 것이다. 두 가지 내용을 비교해 보면 그 내용이 완전히 거꾸로 뒤집혀 있음을 알 수 있다.
- 일본 회여록의 내용
?來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 新羅城?城 倭滿倭潰城?......
(왜군이) 되돌아 추격하여 임나가라까지 이르러 계속 성을 공격하니 성이 곧 함락되었다. 안라인 주둔군이...... 신라성...... ?성 ......왜가 가득하였다. 왜는 성을 무너뜨렸다.
- 100년 뒤 중국 주운대의 정밀탁본을 바탕으로 한 중국학자 왕건군의 풀이
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 拔新羅城鹽城 倭寇大潰 城大......
왜군을 뒤로부터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에 이르러 계속 성을 공격하니 곧 함락되었다. 안라인(신라인) 수자리군사가 신라성염성을 공격하자 왜구(倭寇)가 크게 무너졌다. 성내......
'?래'(?來)가 '자왜'(自倭)로 밝혀짐에 따라 '추격하던 일본군'이 '추격을 당하던 왜군' 형상이 되고, '왜만왜궤'(倭滿倭潰)가 '왜구대궤'(倭寇大潰)로 밝혀짐에 따라 '가득 한 왜군이 성을 무너뜨렸다'가 '왜구가 크게 깨졌다'로 뜻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비문이란 갈수록 마모되고 탁본을 많이 하다 보면 그 부분이 훼손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100년 전의 글씨가 틀리고 100년 뒤의 글씨가 더 정확하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림 중 왼쪽의 사카와 쌍구가묵본은 마치 붓글씨로 쓴 것처럼 정확한데도 불구하고 상태가 훨씬 나쁜 오른쪽 주운대의 탁본을 훨씬 더 인정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바로 여기에 사카와가 만주에서 일본으로 가져온 탁본의 진위 문제가 나오게 된다. 그림에서 쌍구가묵본의 만(滿)자는 마치 쓴지 얼마 되지 않은 붓글씨처럼 명확한데, 1981년에 정밀탁본한 것을 보면 분명히 구(寇)자이다. 지금도 '구'자는 아주 쉽게 식별할 수 있는데 100년 전에 실수해서 '만'자로 그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분명히 누가 변조한 것인데 그 주범이 누구일까? 이것을 이본 참모본부의 음모라고 주장한 사람이 이진희 씨다.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 : 탁본과 달리 비문 위에 종이를 대고 글자 주변을 선으로 그리거나 이미 한 탁본을 대본으로 하여 복사하는 것인데, 이런 작업을 쌍구(雙鉤)라 한다. 쌍구한 것을 선으로 그린 글자만 남기고 나머지 종이면을 먹으로 칠해 탁본처럼 만든 것을 가묵(加墨)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탁본하는 사람이 그 글자를 보고 나서 그 모양 그대로 그리는 과정에서 명확하지 않은 글자는 자의적으로 고치거나 가필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 면에서 쌍구가묵본은 비문에 종이를 대고 정확하게 비면의 상태를 복사하는 탁본과는 다르며, 좀더 분명하게 정의한다면 탁본이 아닌 것이다.
3)광개토태왕비의 변조
1970년대 이후 일본의 광개토태왕비 변조설이 광개토태왕비의 주된 테마로 등장하게 되는데, 이진희 씨가 쓴 '광개토왕릉비의 탐구'란 한 권의 책이 그 기폭제가 된다. 이진희씨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광개토태왕비 쌍구가묵본을 만들어 온 사람은 현지에서 간첩 활동을 하고 있던 사카와 중위 라는 것과, 그렇게 들여온 쌍구가묵본을 이용해 일본 최고의 학자들을 동원하여 참모본부가 임나일본부설을 창출해내는 과정을 추적하여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이진희 저, 이기동 역, '광개토왕릉비의 탐구, 일조각)
한편 이진희 씨는 비면에 석회를 바르고 탁본한 사실을 들어 그 당사자가 누구이고 무엇 때문에 석회를 발랐는지를 추궁해 나간다. 비면의 요철이 심해 탁본하기가 어려워 글자가 없는 곳에 석회를 바르고 탁본을 하기 때문에 석회를 바르는 과정에서 비문을 변조할 수 있게 된다. 이진희 씨는 태왕비에 석회를 바른 것은 사카와의 쌍구가묵본을 보강하기 위해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저지른 일이라고 폭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진희 씨의 주장은 한.일 양국에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그에 따른 연구열도 높아졌다. 결론부터 말하면 태왕비에 석회를 발랐던 것은 사실이다. 일본 학자들이 일찍이 밝힌 일이고 중국 학자들도 확인하고 있다. 또 석회를 바르고 뜬 탁본도 상당히 존재하고, 그 내용이 사카와의 쌍구가묵본과 거의 같은 것도 사실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누가 석회를 발랐느냐 하는 것인데 일본은 그 행위를 부인하고 있고 중국의 왕건군도 이에 동조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 역사 왜곡을 위해 저지른 헤아릴 수 없는 죄과들을 보았을 때 숨겨진 것이 더 많았으면 많았지 억울하게 뒤집어쓴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일본은 그만큼 무슨 일이든 용의주도하게 추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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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5.08.14
  • 저작시기2005.0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09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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