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영화제작사들의 흐름에 대한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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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제시대 영화제작사들의 흐름에 대한 조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민족말살을 도모한 일제는 1943년부터 이른바 성전수행을 위한 어용영화를 제작해 냈다. 이에 앞서 1940년 1월의 조선영화령 공포로부터 1942년의 영화발족사이에 잠정적으로 필름배급제도를 철저하게 실시하게 되었는데 영화사의 존속을 위해서 고려영화협회가 일본의 동보영화주식회사와 합작하여 "망루 결사대"(금정정감독, 1943년)를 만들었다. 하기는 1938년에 만들어진 "군용열차"는 전에 경향파의 영화평론가였던 서광제가 일지사변에 편승하여 감독한 군국어용영화였다. 1919년부터 1940년대까지 일제어용영화를 만든 것은 서광제 한사람뿐이겠다. 이러한 사실은 놀랄만한 일이 아닐까? 그만큼 일제식민지시대의 조선영화는 한민족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민족정신을 형상화했고 또 그것을 깨우쳐 왔다. 그러나 일제는 조영을 발족시키면서 조선의 영화인들을 협박과 회유로서 강제동원하였다. 즉 영화인기능증명서를 발행하고 창씨개명 등을 강요한 뒤에 영화계에 취업할 자격을 주었다. 여기에 거역하면 비국민의 낙인이 찍히고 밥을 굶어야 했다. 기능심사는 총독부경무국의 혼다 다케오도서과장을 위원장으로 하여 사무관, 이사관, 검열관들이며 몇사람의 영화인이 지명되었다. 조선총독부는 다시 영화기획심의회를 설치(1942년10월26일)하여 조선에서 제작하는 영화를 기획심의하였다.
1943년에서 1945년사이에는 민간제작영화는 전무했고 법인 조영의 영화는 완전히 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의 정책에 의하여 제작되었다. 조영이 제작한 영화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이제야 가리"(1943년, 박기채감독), "조선해엽"(1943년, 박기채감독), "젊은 모습"(1943년, 풍전사랑감독), "거경전"(1943년, 방한준감독), "병정님"(1944년, 방한준감독), "태양의 아이들"(1944년, 최인규감독), "너와 나"(1944년, 허영감독), "사랑의 맹세"(1945년, 최인규감독), "가미가제의 아이들"(1945년, 최인규감독), "피와땀"(1945년, 신경균감독), "우리들의 전장"(1945년, 신경균감독), "감격의 일기"(1945년, 신경균 감독)이러한 영화는 그 전부가 지원병제도의 선동, 출정한 남편과 아내의 의무, 내선일체강조, 황국신민교육, 군수물자증산 등을 그린 군국어용영화요 조선민족발탁을 기도한 영화였다.일제는 이러한 영화를 만들어 강제로 민중에게 보였다. 조선총독부는 사단법인 조선영화배급사를 설립(1942, 5, 1)하고 나서도 조선영화개발협회를 다시 설립(1940, 1, 7)하여 전조선 구석 구석까지 영화반을 파견, 순회하여 시국강연과 영화관람을 위해 민중을 강제동원하였다. 일제의 이러한 모든 영화통제정책은 세계영화사상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영화들은 과연 진정한 한민족의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그 대답은 너무나 명백하다. 그것은 한민족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라 일제에 의해서 만들어진 식민영화인 것이다.그러나 일제말기의 이러한 무자비한 탄압 하에서 끝까지 민족적 지조를 지킨 영화계의 지도적인 인물들은 일제에의 협력을 끝까지 거부하였다.나운규의 죽마고우이며 독립운동의 동지였던 윤봉춘(감독, 배우)은 조영이 발족하자 경기도의정부의 산곡리라는 벽촌에 숨어서 논밭을 갈며 산곡학원을 열어 조선어와 조선역사를 가르쳤다.이규환은 총독부관리들과 일본인 친지들의 끈질긴 협박과 권유를 뿌리치고 만주 등지를 방황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는 평택비행장을 건설하는 강제노동에 끌려가 개심봉으로 매를 맞으며 허약한 몸으로 종전까지 노동하였다.전창근은 항상 뒤따르는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 숨어 살면서 지방순회극단의 잡역을 하면서 일제말기를 보냈다. 이들은 모두 삼순구식의 굶주림을 이기며 초창기부터 헌신해왔던 영화계를 떠났으며, 하늘을 우러러보며 민족의 비운에 통곡하였다.그러나 이러한 가운데 제2차세계대전의 전국은 이태리와 독일이 잇달아 패망하고 드디어 1945년 8월 15일에 일제도 연합군 측에 무조건 항복하므로써 종전의 날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이날은 한민족이 일제식민지로부터 해방되는 날이기도 하였다.해방을 맞이한 온 겨레의 감격을 필설로 말할 수 없지만, 그 감격의 소용돌이 속에서 윤봉춘, 이규환, 전창근 등은 은신처와 강제노동에서 달려나와 서로 부둥켜안고 절규한 채 눈물을 흘렸다.그리고 35년간에 걸친 일체식민지의 악몽에서 깨어난 영화계는 이들을 구심점으로 하여 새로이 부활한 조국의 영화를 창조하는 획기적인 영화사의 새 장을 열게 되었다.
이밖에 영화에 있어서는 1926년에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이 제정공표되었고 1928년 이를 강화시행했다. 이들의 검열이란 영화자체뿐만 아니라 영화인의 인신구속까지 포함함 것이어서 당시 무심코 길을 걷다가 경찰서에 끌려가 취조를 받는다던가 촬영현장의 사찰을 받는다던가 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필름검열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사상성이 있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윤리적인 문제성이 있는 것도 가혹한 규제대상이 되었다. 홍개명감독의 "혈맥"(1928년)은 상영금지된 최초의 사례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러한 혹독한 검열도 30년대 후반이후로 나타난 한민족말살정책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30년대초에는 영화제작에 절망한 사람들이 망명하여 상해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그곳에서 상해파를 형성하고 상해임시정부를 돕는 한편 영화 "양자강"을 만들었다. "양자강"은 1932년에 국내에 수입되어 상영되었고 이들은 상해를 중심으로 하여 많은 활동을 했다.
활동사진이라는 신기한 서구문물은 오락적인 요소, 외국의 문물을 접할 수 있는 기회로써 흥미롭게 다가왔지만 표현의 수단으로써 다른 신문, 문학등과 함께 일제시대 많은 검열과 규제가 있게 되었다.
한국에 영화가 들어와 기업적인 구조를 스스로 갖추어 가기 전에 일본의 강제적 영향으로 일본의 방식과 체제를 이어져 내려온 것이 가장 아쉬운 점으로 생각된다. 분명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을 잘 구분하여 좋은 영향만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만약 영화가 일제시대를 거치지 않고 발전해 왔다면 어떤 방향으로 흘러 지금 우리에게 왔을까.
그리고 아직도 행해지고 있는 검열의 정당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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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1.08
  • 저작시기2005.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19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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