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자 박제가 - 북학의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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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I.박제가의 생애
1.생애와 저작

II.문학을 통해 본 박제가

III.박제가의 사상과 학문관
1.박제가의 사상
2.박제가의 학문관

IV.박제가의 북학사상과 성리학
1.성리학과 박제가 사상의 관계
2.박제가 화이관의 성격
3.박제가의 중국사관

V.북학의
1.북학의 소개
2.북학의에 나온 경제사상
3.박제가의 통상개국론(通常開國論)
4.통상개국의 방법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서 보이는 대동과에는 가끔 만명 씩 응시하며 놀고 먹는 계층이 생긴다고 보았다.
그래서 박제가는 이들 사대부를 우선적으로 무역에 종사시키자고 하였다. 이들 유식 사대부들은 자본금도 없으므로 국가에서 자금을 대부해 주고 가계를 설치해 주어서 좋은 성과를 올린 자에게는 그 능력을 인정하여 높은 벼슬에 발탁시키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고 있다. 이과 같이 되면 국가에서는 유식계층(遊食階層)이 줄어 들게 되고 또 무역에 지배계층을 참여시켜 상업에 대한 백성의 인식을 크게 바꿔 놓을 수 있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보았다.
③ 통상 수단으로 사용하는 은(銀) 아껴야 한다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명과의 세공문제(歲貢問題)로 모든 광산을 폐광시켰기 때문에 은의 축적은 왜(倭)국과의 직접적인 교역과 왜, 청과의 중계무역을 통해서 이득을 취하므로 가능하였다.그 후 왜 청간의 장기도(長崎島) 교역이 열리게 되어 왜은의 대량 획득이 어렵게 되었고 은의 비축량이 격감되어 국내 광은(鑛銀)으로 충당하고저 노력하였으나 산출량이 여의치 못했다. 이러한 상황인데도 부경사행(赴京使行)들은 일찍부터 다량의 은을 가지고 중국에 들어가 궁중이나 사대부들이 필요로 하는 사치품만을 구입해 왔으며 조선 중기 이후에는 사행들과 병행하여 사무활동도 활발해져 은의 유출이 더욱 심해졌다. 여기에 편승한 私貿易을 통해 유출되는 은자가 천만냥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실학자들은 은의 유출을 매우 걱정였다. 성호는 금과 은이란 한번 광에서 나오면 늘 있게 되는 것이고 외국으로 유출시키지 않는다면 왜 쌓이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고 반문하며 은의 유출을 막아야 한다고 하였다. 박제가도 마찬가지로 은의 유출을 염려하여 천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을 물건을 가지고 반나절 반년이면 없어질 비단이나 약재와 교역함이 불가함을 역설하였다. 이것은 서양의 중상주의자들이 은을 중시하였던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선진적 사상이었다. 박제가는 해외통상의 기본원칙이 부의 축적을 통한 부국강병이기 때문에 무역품의 선정에도 신중을 기하고자 하였다. 즉의 은의 유출을 최대한 줄이는 방향이 최선의 방법이라 하였다.
④ 황당선(荒唐船)을 통상에 이용하자고 하였다.
황당선이란 내양에 출몰했던 외국 선박을 말하는데 주로 당선(唐船)을 지칭하고 일본과 국교가 단절된 후에는 왜선도 포함하여 불렀으며 정조 18년 이후에는 서양선도 출몰 하였는데 이는 이양선이라고 지칭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황당선이라면 왜선 당선 서양선을 통칭하지만 주로 중국선만을 지칭한다. 황당선이 근해에 출몰하는 것은 일본과 무역왕래 하거나 원양에서 어로하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거나 우리나라 근해에 와서 해초를 채취해 가는 어로 행위를 하기 위에 적극적으로 접근 했다. 이 황당선은 대개가 등주(登州) 등의 중국인이므로 이들을 금지 시킬 수 없을 바에는 시장을 개설하고 후(厚)하게 대접하여 그들과 사귄 후 교역을 하자고 하였다. 배에 올라가 교역을 할 때에는 시끄럽게 지껄이거나 물건을 날치기 하는 것을 막아 신의를 지켜 중국인들에게 조소와 업신 여김을 받지 않도록 하고 선주를 후하게 대접해 보내면 황당인들은 초청하지 않아도 올 것이라고 내다 보았다. 만약 저들이 오지 않으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외국 상선을 인도하여 내선(來船)시켜 통상하도록 하자고 하였다. 통상 대상국을 선정할 때 왜국(倭國)은 간사하여 항상 이웃 나라를 넘겨보며 또 안남(安南) 대만 등지는 모두 험하고 멀어서 통할 수 없으므로 남중국을 택하여 민중(中) 절강(浙江) 교주(交州) 황동(黃東) 등지성(等地城)과 교역해야 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이 지역은 다른 여러나라와 중계무역이 활발하고 거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이다. 등주(登州) 우리나라로부터 직선 거리가 600여리 밖에 안되기 때문에 지난날 송선이 고려와 통상할 때 명주에서 예성강 까지는 7일 밖에 걸리지 않았다. 중국과 교역할 때는 등주과 내주의 배는 장성에 닿도록 하고 금복 해성 지방의 배는 선천(宣川)에서 교역할 수 있도록 하며 강주 절강 천주 의주 지방의 배는 은진(恩津)과 여산(礪山) 등지와 교역하도록 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박제가는 막연한 통상론이 아니라 당시에도 해금정책(海禁政策)만 바뀌면 금방 실현 가능한 실용적이고 실질적인 통상개국론을 제시하였다.
⑤ 단계적이고 자주적인 통상개국론을 주장하였다.
박제가는 통상개국하기 위해서는 통역관을 적극 양성하여 외국 정사에 능통해야 하며 사족인 지배계급이 무역에 참여하므로 종래 농본억상적인 산업관을 바꿔야 하고 황당선을 이용하여 우선 중국과 통상하고저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의 국력이 미약하기 때문이지 통상개국의 정론(定論)은 아니라고 보았다. 지금 중국하고 통상하고 다른 외국과 통상하지 않는 것은 한 때의 권의지책(權宜之策)이지 정론은 아니며 국력이 강해지고 민업이 안정되면 차례로 해외제국(海外諸國)과 통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 얼마나 훌륭한 식견이며 선진적 견해였던가?)
그러나 당시 사회는 이러한 훌륭한 정견을 포용하지 못하고 쇄국론만 고집했기 때문에 강화도 조약을 강요당하고 단계적 통상개국이 아닌 일방적 강요와 준비 없는 개국이었기 때문에 자주적 자생적 길을 걷지 못하고 민족적 비극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참고문헌>
北學議, 朴齊家
金龍德, <貞 朴齊家 硏究> 第 一部 朴齊家의 生涯, 中央大論文集5, 1961
鄭玉子, <文學史的 側面에서 본 貞集>, <<震檀學報>> 52, 1981
朴忠錫, <楚亭의 思想史的 位置> 北學議를 中心으로 <<震壇學報>> 62, 1981
李成茂, <朴齊家의 經濟思想>, <<李海南華甲論叢>> 1970
李相泰, <朴齊家의 通商開國論>, <<南都泳博士 華甲紀念史學論叢>> 1984
*목 차
I.박제가의 생애
1.생애와 저작
II.문학을 통해 본 박제가
III.박제가의 사상과 학문관
1.박제가의 사상
2.박제가의 학문관
IV.박제가의 북학사상과 성리학
1.성리학과 박제가 사상의 관계
2.박제가 화이관의 성격
3.박제가의 중국사관
V.북학의
1.북학의 소개
2.북학의에 나온 경제사상
3.박제가의 통상개국론(通常開國論)
4.통상개국의 방법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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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4.20
  • 저작시기20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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