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건축의 전반적 개관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 사찰의 기원

2. 사찰의 건물과 배치
1) 일주문
2) 천왕문
3) 불이문
4) 범종각
5) 법당
① 대웅전
② 대적광전
③ 극락전
④ 미륵전
⑤ 관음전
⑥ 명부전
⑦ 기타 법당
⑧ 삼성신앙

3. 사찰의 역사
1) 고구려
2) 백제
3) 신라
4) 통일신라
5) 고려
6) 조선

본문내용

성이 이불난사와 초문사를 창건하였다. 또 광개토왕 2년 (403)에는 평양에 9사(寺)가 창건되었고, 문자왕 7년(498)에는 평양 금강사가 창건되었다. 형유왕(618~642년 재위) 때에는 중대사, 진구사, 유마사, 대승사, 대원사, 금동사, 개천사등이 있었고 보장왕(642~668 재위)때에는 반용산 연복사, 영탑사, 육왕사 등이 있었다고 하나 그 위치는 확실하지 않다.
2) 백제
백제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고구려가 불교를 받아들인지 12년 후인 침류왕 원년(384)이며 중국 동진의 미난타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불교가 백제에서 크게 번성하게 된 것은 성왕대(618~642년 재위)부터 시작하여 성덕왕(554~597), 법왕(599)을 거쳐 무왕대(600~640)에 이르는 100여년간 이었다.
불교가 전래된 이듬해에는 한산에 불사를 조영하기 시작했다. 그 후 백제가 도읍을 공주를 거쳐 부여로 옮기고 나서 성왕대에 양으로부터 공장과 화수를 초청하는 등 불사의 조영이 성황을 이루고 또 일본에 불교를 전해주는 등 활약이 컸던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므로 백제의 사원건물터가 밝혀지는 곳도 거의가 부여지방이다.
3) 신라
불교의 도입이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진 고구려, 백제와는 달리 신라에서는 불교도임에 많은 고난이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서기 372년에 불법이 전파되어 375년에 초문사창건이 이루어졌고, 백제에서는 384년에 전파되어 385년에 한산에 불사를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 공인연대가 10년이라는 짧은 시간차를 두고 있으나 신라에서는 국가적 공인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미 내물마립간 말년을 전후하여 민간사회에 포교되기 시작하였으나 국가적으로는 포교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이차돈 사건을 계기로 비로소 527년(법흥왕 14년)에 공인되게 되었다. 고구려에서 불교가 공인된 후 150년이나 소요된 셈이다.
동일 민족, 동일 언어이고 국토의 규모 및 지형으로 보아 고구려나 백제에서 신라 땅으로 국가공인 불교의 전파기간이 150년이나 되었던 것은 국력의 차별성 뿐만이 아니라 신라의 불교는 고구려, 백제와 달리 민간종교로 시작되어 결국 국가의 공인이 이루어졌다는 특성을 갖는다. 신라에서는 불교문화 수용이 하부구조에서 성행되기 시작하여 불교에 대한 기본 인식 및 불교의식에 익숙해졌으므로 인접 국가의 불교건축문화가 단기간 내에 대대적인 유입 수용이 가능했던 것이며 불교가 공인된 즉시 흥륜사, 황룡사와 같은 대사찰이 창건될 수 있었다.
4) 통일신라
삼국을 통일하는데 있어서도 불교가 정신적으로 지주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물론이며 왕실불교로 출발했던 불교가 자연스럽게 호국불교적인 측면은 건축에도 잘 드러나는 것으로서 국가가 주도한 대형사찰의 건립이 두드러지며 백제의 미륵사나 신라의 황룡사 등이 이런 국가 불교적 성격이 건축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보아져야 한다.
그러나 통일 이후에는 그러한 거대사찰은 더 이상 지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시대적 상황이 그러한 국가 중심적 종교가 되어야 할 동기부여도 약하고 정치화된 종교의 목적을 더 이상 용납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국가 불교에서 개인 신앙적 불교의 전환 과정이 통일 후 불교의 성격변화의 한가지로서 꼽혀져야 한다.
이러한 경향이 통일 후의 불사건축에서는 수도에 집중되었던 사찰이 지방으로 확산되고 평지에 세워졌던 사찰이 산중에도 세워지며 거대한 상징적 건물중심의 경향이 지형에 맞게 수평적으로 확산되며 인간의 공간 사용 위주로의 계획 경향으로 나타난다. 통일신라의 불교도 당불교와 비슷한 변화곡선을 그리는 것으로 생각된다.
7세기의 상향곡선이 8세기 중엽정도까지는 이어지다가 그 이후로는 다시 하향하는 경향을 보이고 그 대신 9세기부터는 선불교가 새로운 기운으로 퍼져나가며 동아시아의 불교계의 새 주인이 된다. 7~8세기에는 그러한 성숙기의 경향이 나타남과 동시에 8~9세기는 쇠퇴 및 전환의 기간이 된다. 이러한 전체적인 조류 속에서 통일신라에서도 불교의 각 계파가 활발한 움직임을 갖는다.
5) 고려
고려 태조는 개경에 천도하여 도성에 열 개의 사찰을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개경 주변에 왕실의 원찰을 건립하는 등 불교사원 건립에 열성적이었다. 또 그 뒤를 이은 왕들도 사원건립에 적극적이었다. 태조가 개경에 처음 창건하였다는 절은 법왕사 왕륜사 등 10개의 사찰이었다.
계속해서 개경 외곽의 오관산에 대흥사, 성내에 안화사, 흥국사를 창건하였다. 이 사찰들은 후대에 가면서 개경내의 중심 사찰로 나라에서 중요시 한 사찰들이다. 태조 이후로도 개경 주변의 사찰 창건이 계속되었는데 중요한 것으로 광종 때 태조 원당으로 지은 봉은사, 태조 어머니 유시의 원당으로 지은 불일사가 있다.
6) 조선
조선시대에는 억불숭유정책으로 말미암아 특별하게 나라의 지원을 받는 몇몇의 사찰을 제외하고는 절의 건립이 매우 위축되었으며 기존 도성내의 사찰들은 철폐되어 향교나 서원등의 유교건축을 지을 때 그 부재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사찰들이 불타고 그 이후 광해군에서부터 영, 정조대에 계속적인 중창 및 보수공사가 이루어졌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사찰들은 이 당시에 과거의 가람배치에서부터 건물의 세부양식에 이르기까지 부분적 또는 전면적으로 개조되어 새로운 양식의 가람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사찰은 주불전 앞의 중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루와 승방, 요사채 등으로 이루어지는 산지형 가람이며 이전에 중요한 예불의 대상이었던 탑은 규모가 축소되거나 아예 소멸되어 버리는 경향도 나타난다.
< 참고문헌 >
김봉렬, <빛깔있는 책들 사찰> , 대원사, 1991
주남철, <한국의 목조건축>, 서울대 출판부, 1999
윤장변, <한국 건축사> , 동명사, 1998
류경수, <우리 옛 건축에 담긴 표정들>, 대원사, 1998
<그림과 명칭으로 보는 한국의 문화유산 1>, 시공테크, 2002
김철준, <한국문화사론>, 지식산업사, 1976
김재경, <한국문화사강좌>, 탐구당, 1995
한국민족문화연구소, <한국의 문화유산>, 부산대 출판부, 1998
한국역사연구회, < 역사문화수첩 >, 역민사, 2000

키워드

  • 가격2,0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6.04.24
  • 저작시기2005.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45780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