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국내 독립운동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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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제시대 국내 독립운동 조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프랑스 영화의 특징
- 아방가르드
- 필름 누아르
- 누벨바그 (1959 - 1964)

2. 감독의 성향 및 특징 ; 프랑수아 트뤼포

3. 줄거리

4. 영화의 특징

5. 감상 및 느낀 점
[ 일제시대하의 국내 독립운동 조직 ]
Ⅰ. 신민회
1. 창립 과정
2. 목적과 이념
3. 조직
4. 활동
⑴ 민력양성의 방법 : 신교육 구국운동
⑵ 계몽강연 ․ 학회운동
⑶ 잡지 ․ 서적 출판 운동
⑷ 민족 산업 진흥 운동
⑸ 청년운동
⑹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창건운동

Ⅱ. 신간회
1. 설립배경
2. 결성과정
⑴ 자치론의 대두
⑵ 조선공산당의 협동전선론
⑶ 신간회의 창립
⑷ 신간회의 조직과 활동
⑸ 신간회의 해소

Ⅲ. 조선광문회

Ⅳ. 조선어학회

Ⅴ. 진단학회
1. 진단학회의 순수성 의문
2. 진단학회에 대한 평가

본문내용

만든 발단은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그해 여름 함흥 영생 고등여학교의 한 학생이 기차 안에서 불온 언동으로 심문을 받았는데 일제 경찰은 이를 꼬투리로 이 학교교사였던 정태진을 체포하였다.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을 맡아보던 정태진이 고문에 못 이겨 조선어학회가 독립운동단체라고 허위 자백하는 바람에, 불똥은 조선어학회 회원 전체로 번진 것이다. 일제 경찰은 조선어학회가 조선어사전편찬을 통해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높임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민중 봉기를 통한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 결사라고 몰고 갔다. 끝없이 지연되는 수사와 심문 끝에 조선어학회 관계자들에 대한 예심은 2년 만인 1944년 9월 말에야 끝났다. 그러나 가혹한 고문과 추위, 굶주림에 못 이겨 이윤재와 한징은 옥중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회원 중 12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1심에서 이극로는 징역 6년을, 최현배는 징역 4년, 이희승은 징역 2년 6개월, 정승인과 정태진은 징역 2년 등 실형을 선고받았다.
조선어학회사건의 배경에는 태평양전쟁이 격화되는 와중에도 조선인을 완전히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일제의 의도가 깔려있었다. 1930년대 후반부터 조선어 사용을 금지시킨 일본에게는 창립(1929년)이래 한글날 제정, 잡지 <한글> 발행, 한글 강습소 운영 등으로 조선어를 지키는 보루였던 조선어학회가 눈의 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다. 더구나 당시 조선어학회가 전력을 기울이고 있던 조선어 사전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막아야 하는 일로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5,000년 역사를 가진 민족의 언어를 인위적으로 없애겠다는 발상은 성공할 수 없었다.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했던 조선어사전 원고는 결국 해방과 더불어 옥중에서 풀려난 그들의 손에 의해 1947~1957년에 <우리말 큰 사전> (전 6권)으로 완성되었다.
Ⅴ. 진단학회
1934년 5월 한국과 그 주변지역 문화연구를 목적으로 창립된 학술단체이다. 당시 한국학 연구의 주도권과 연구 성과 등 주요자료 모두를 일본인들이 독점하고 있었으므로, 민족적 자존심과 민족의식을 일깨워 한국문화를 발전에 진력한다는 뜻을 모아 창립을 결의하게 되었다. 발기인은 이병도, 고유섭, 김두험, 김상기, 김윤경, 김태준, 김효경, 이병기, 이상백, 이선근, 이윤재, 이은상, 이재욱, 이희승, 문일평, 박문규, 백낙준, 손진태, 송석하, 신석호, 우호익, 조윤제, 최현배, 홍순혁 등이었으며 실무위원으로 이병도, 이윤재, 이희승, 손진태, 조윤제 등을 뽑았다.
한국과 그 주변 문화 연구, 1년에 4회 <진단학보> 발행, 강연회와 간담회 등의 사업을 펼쳐 큰 호응을 받았으나,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이윤재, 이희승, 이병기 등이 일본 경찰에 붙잡혀가면서 학회활동도 중단되었다.
1945년 광복 후에 <진단학보> 발행을 재개, 그 해 5월 사단법인으로 편성되었다. 1959년부터 <한국사> (7권)을 10여년에 거쳐 편찬 발행하였다. 현재 500여명의 회원이 있고 연 2회 진단학보 발행 및 한국 고전 연구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있으며, 이병도의 학문업적을 기리는 두계 학술상운영위원회를 두어 2년마다 한국과 그 주변지역 인문사회과학에 대한 역사적 연구 논점을 대상으로 수상자를 선정 시상하고 있다.
1. 진단학회의 순수성 의문
진단학회를 조직했던 이병도 등은 일제가 한국사 왜곡을 위해 만든 ‘조선사편수회’의 연구원이었다. 진단학회 자체도 민족적 연구기관이라기보다는 이병도 등이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보고하는 단체일 뿐이었다.
‘이병도’의 한국사 연구와 관련된 행적은 많이 밝혀지지 않았다. 진단학회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일제 조선사편수회의 ‘우리역사 말아먹기’의 한 축을 담당했던 이병도가 참여했기 때문이다.
1922년에 조선사편찬 위원회가 설립되고, 1925년에 조선사편수회를 설립하여 식민사관에 입각한 <조선사> (35권, 1937년)를 발간했다. 이러한 식민사관은 우리 민족이 열등의식과 무력감에 사로잡히는 심리적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이병도는 한국사의 발전에 큰 축을 담당하였지만, 그 대부분은 ‘반도사관’에 의한 것이다.
조선사편수회에서 태워버린 우리의 사서가 20여 만 권이나 된다. 진단학회는 손진태와 이병도가 참여한 것으로 보아 식민사관이나, 반도사관 중심적이다. 또한 그 일당이 교과서를 편찬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행적이 옳은 행위인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이병도의 수제자 이기백이 교과서 제작에 총지휘를 했다.
2. 진단학회에 대한 평가
진단학회는 실증사학이 입장에서 우리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연구하고 사료를 모아서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려는 데에만 목적을 두었고, 일제의 역사 왜곡이나 탄압에 대해서 소극적인 입장을 보였기 때문에 ‘현실 도피적’이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역사를 바라보는 과정에 따라 진단학회가 한 일은 다르게 평가될 수 있다.
⑴ 역사를 단순히 기록하는 실증주의적인 입장.
⑵ 역사가의 사회적 책임을 중시하는 입장
진단학회는 실증사학의 입장에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으나,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비판받았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으려 하지 않은 것은 역사학자로서의 자세가 아니다. 자신의 사관에 대해서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난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단학회가 온전히 비난만 받는 단체는 아니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볼 때, 실증사학에 맞게 역사를 연구한 진단학회는 나름대로의 공헌을 하였다는 점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Ⅵ. 자료 출처
한메 디지탈 대백과 사전
http:// www.dalgu.net/55815/w-34.htm
http:// www.cue.ac.kr/~moed/lecture/cho/hks111-3.htm
http://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317-josungoangmunhoi.htm
http:// www.history21.co.kjr/kooksa/국사색인/용어설명/조선어학회
http://arcady.com.ne.kr/adieu/in/a13.htm
http://kr.encycl.yahoo.com/final.html?id=143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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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2.12
  • 저작시기20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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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94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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